[불감시대] (33) 제1부 : 1997년 가을 <3> '흔들리는 노욕'

글 : 홍상화

"잠깐만 들어보십시오.오늘 저녁 프로그램에서 보니까 이 교수의 몸가짐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황무석이 전화기에다 대고 타이르듯 말했다.

"뭐라고요? 그런 쓸데없는 말이라면 당장 전화 끊어요"

이정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깐만 들어보십시오.오늘 저녁 이 교수가 보인 언동으로 보아 어떻게 교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술집 작부로 혼동할 지경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야? 어떤 미친놈이야?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전화가 끊어졌다. 윙 하는 소리만이 그의 귀에 울려퍼졌다.

별의별 욕을 다 들어봤어도 미친놈 소리를 듣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더구나 여자에게서,젊은 여자에게서 욕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황무석은 혹시 가족이 들었나 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도 귀가하지 않았으나 황무석은 수화기에 대었던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손수건을 수화기에 다시 대고 전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하는 이정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어떻게 교수야? 외간남자와 멋대로 놀아나고 공갈이나 치는 처지에..."

황무석이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이 미친놈아,미칠려면 곱게 미쳐.한 번만 더 전화질하면 경찰에 연락할 거야"

전화가 다시 끊어졌다.

다시 버튼을 눌렀다.

전화벨 소리가 스물다섯 번이나 울리고 스물여섯번째 울릴 때야 이정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경찰에서 당신 번호를 추적하고 있단 말이야.이 바보 같은 놈아"

황무석이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정말로 전화번호가 추적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하며,자신이 이정숙의 놀림감이 되었음을 알았다.

통쾌하게 웃고 있을 이정숙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대로 있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가족을 대할 수 있을지,참담한 심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다시 가족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지?

황무석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래 내가 그토록 못난 놈인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내 가족을 보아라.

어디에 내놓아도 꿀릴 이유가 없다.

이정숙이 나에게 뭐라고 했더라...뭐 바보 같은 놈이라고?

이년! 이정숙 이년!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년...

황무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황무석은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그냥 이대로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문득 이정숙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회자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한동안을 왔다갔다 하다 한 곳에 섰다.

두 사람의 불륜관계를 증명할 증거를 확보하면 그 증거로 이정숙의 입을 봉해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 일을 시키지?

황무석은 다시 왔다갔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