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35) 제1부 : 1997년 가을 <3> '흔들리는 노욕'

글 : 홍상화

황무석은 신문을 내려놓고 멍한 기분으로 벽을 응시했다.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던 날 찍은 가족사진이 그곳에 걸려 있었다.

2,3년만 있으면 조교수가 될 터인데 폴란드에 가서 고생을 하면서 2년의 세월을 허송하겠다는 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지 크게 잘못되어가는 것 같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죄지은 사람처럼 허리를 웅크린 채 들어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정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아내를 원망하는 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긴요,애가 심성이 워낙 착해서 그래요"

"심성이 착한 놈이 아버지한테 한마디 의논도 없이 결정한단 말이야?"

"..." "당신하고는 의논해왔어?"

"저도 무척 말렸지요.

6개월 전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기업에 들어가 외국에서 일하겠다는 엉뚱한 소리를 해왔어요"

"뭐라구? 그럼 교수직도 때려치우겠다는 거야?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나!"

황무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작은딸 미진이 들어섰다.

"너는 알고 있었니?"

딸이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황무석이 화난 목소리로 딸에게 물었다.

"오빠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아빠,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두세요.

저는 오빠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성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황무석이 언성을 높였다.

"아빠도 생각해보세요.

오빠는 지금 대학 전임강사에서 2,3년 있으면 조교수가 되고 세월이 지나면 정교수가 되어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요.

오빠는 그런 안일한 생활이 싫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안일한 생활이야? 학문 추구가 있잖아"

"오빠는 교수 임용에도 돈을 써야 하는 현 대학 교수사회의 분위기나 안일하기만 한 나이 먹은 교수들의 사고방식에 환멸을 느꼈대요.

좀더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오빠를 저는 존경해요"

그렇게 당돌하게 말하는 딸의 얼굴을 황무석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보았다.

황무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다 나가.

꼴도 보기 싫단 말이야"

황무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내와 딸이 서재 밖으로 나갔다.

황무석이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하늘이 무너져 덮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정성들여 키운 아들이,그렇게 애정을 주며 키운 딸이 이제는 아버지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겠다고 한다.

잘못돼도 아주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교수직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고 폴란드에 가겠다고?

그리고 뭐? 그런 오빠를 존경한다고?

이정숙 같은 년이 교수이니 교수가 싫어질 수밖에... 이년.무슨 일이 있어도 이년이 다시는 텔레비전에 나가지 못하게,이년이 두 번 다시 공갈을 치지 못하게 해놓을 테다.

.. 황무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