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97) '汎재계 참여..'

[ 汎재계 참여 73년 출범 ]

1973년 10월6일 2백33대의 이집트 전폭기가 이스라엘을 기습 폭격했다. 이를 지원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이 일시에 유가를 4배,즉 배럴당 10달러 이상으로 인상했다.

이로써 석유를 무기화하는 1차 유류파동이 시작됐다.

한국과 같이 기름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는 "인류의 종말론"에 가까운 위기 의식에 사로잡혔다. 일본 등도 이 이상의 경제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며 국가적 패닉(panic :공황)상태에 빠졌다.

필자의 생생한 기억으로도 한국의 앞날은 캄캄했다.

문자 그대로 한국전쟁 이후 최대 위기로 느껴졌다. 지난 1997년말 IMF (국제통화기금)지원보다 1차 오일쇼크가 훨씬 더 심각했던 것 같다.

외환파동의 위기에는 IMF가 있었다.

하지만 유류파동 때는 이를 조절할 국제기구가 없었다. 정부는 몹시 당황했다.

부랴부랴 유류소비 절약,국가적 관리를 위한"열관리법"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경제협력을 위한 유럽 출장에서 귀국하니"열관리협회"창립을 맡아 달라는 상공부 부탁이 들어왔다.

상공부 협조공문 내용은 이러했다.

"유류파동에 대처하고 에너지 절약,열관리 기술개발,보급 등 기업체의 지도기구로 열관리협회를 조직한다.

이를 전경련이 주도해 주길 요망한다"

이어 상공부 심의환 차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공부 협조 공한을 받으셨지요.

열관리협회 설립과 운영을 김 부회장이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이런 국가 위기에 큰 역할을 할 열관리협회는 김 부회장이 책임져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견들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난국을 생각해서 수락하길 바라오"

필자는 원래 정부와 관계되는 일은 필요이상 신경만 쓰고 성과는 적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니 이 제안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 부득불 맡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곧바로 에너지 대량 소비회사 대표 22명으로 "열관리협회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필자는 "선두에 나서지 않은 종전의 관례"를 깨고 설립위원장이 됐다.

1974년 5월30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임시의장에 필자가 선임됐다.

그러나 회장에는 전경련 김용완 회장을 모시기로 했다.

본인은 한전 사장 등 8명이 맡은 부회장단중 한사람이 됐다.

고문으로 태완선 상의회장,박충훈 무협회장,김봉재 기협중앙회 회장을 추대했다.

이사진에는 김용주 정주영 이정림 최태섭 회장 등 경제계를 총망라해 구성했다.

회원은 에너지 대량 소비업체 8백6개,열기기 제조업체 2백여개 등 1천여 회원으로 출범했다.

당시 오일쇼크에 대한 위기의식과 "국난"극복의 열기가 반영된 것이다.

지금 회고해도 열관리협회 출범때의 관심과 기대는 자못 컸다.

협회의 업무 또한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선진 열관리기법 도입 및 보급 연료사용 기기의 효율제고 및 안전관리 열관리 교육 및 국민계도 기업 가정 열관리 순회지도 열관리 진단.기기검사 열관리사 양성 및 열관리 연구소 설치운영 등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죄다 열거한 셈이었다.

초창기 사무국 직원들도 헌신적이고 사명감에 불탔었다.

초대 전무를 서울공대 기계공업과를 졸업한 김순혁씨가 맡았다.

공업진흥청 국장 출신인 권오수씨와 한전 임원을 지낸 양설현씨가 상무로 일했다.

뒤에 전경련국제부장 출신인 박종욱씨가 상무를 맡았다.

1974년 말에 일본에너지협회를 방문한 일이 있다.

당시 일본 사무국장은 한국의 오일쇼크 대응 조치가 부럽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열기는 5년도 못돼 식어버렸다.

세계경제가 유류파동 충격에서 회복되니 한국의 수출도 다시 증가했다.

위기의식도 안개처럼 사라졌다.

하루는 박종욱 상무가 보고차 왔기에 협회 실태를 물었다.

한참 망설이더니 하는 대답이 "새 회장으로 3성 장군이 오셨는데 오자마자 사무실에 빨간 카페트를 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박 상무는 풀이 다 죽어있었다.

"열관리협회에 무슨 카페트가 필요한가" 순간 내 머리를 스쳤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