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수 '스크린 에세이'] '매그놀리아' .. 미움과 고통이 강물처럼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해진다는 말은 삼국지의 유비가 남긴 유언의 한 구절이다.

흉악범도 사형대에 서면 대개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는 최후진술을 한다고 한다. "매그놀리아"를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둔 두 가장이 자식에게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며 속죄의 말을 한다.

한 사람은 젊은 여자에 현혹돼 어린 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다른 한 사람은 근친상간으로 딸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아버지의 소행이 이쯤 되면 천인공노할 죄과라 할 것이다. 그러니 당하는 자식의 입장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아들은 성을 바꿔 가문을 등졌고 딸은 죽어가는 몸으로 용서를 비는 아버지를 문전박대한다.

그래도 아들은 병상을 찾아 눈물로 임종을 지켜보지만 쉽사리 아버지를 용서 못한다. 영화는 마치 결손가정의 쇼윈도같다.

가장이 죽어가는 두 집안의 틈새에 부자간의 갈등을 빚는 또 다른 집안을 끼워 넣어 망조 든 집안만 한 곳에 모았다.

세 집안의 연결 고리는 퀴즈방송프로인데 그것이 그들의 뒤틀린 가족관계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리송하다. 그러나 복잡한 구성요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를 3시간 넘게 이어가는 감독의 역량은 알아 줄만하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국면전환이 빠른 것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10여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통속에 신음한다.

가해자의 괴로움이 있는가 하면 피해자의 쓰라림이 있다.

용서를 받기엔 너무 늦었고 관용을 베풀기엔 가슴속의 응어리가 깊다.

그런 고통은 주변인물도 예외가 아니다.

권총을 잃어버린 경찰관도,환자의 안락사를 돕는 간병인도 모두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사랑이지만 그 "묘약"은 항상 신기루처럼 멀리 있거나 애써 잡아도 곧 고통으로 변한다는 시각이다.

"인생은 고해"라는 동양 전래의 불교적 사고가 서양감독에 의해 철저히 표절(?)된 형국이다.

이 영화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는 가운데 구성이 실타래같이 얽히고 설켜 스토리를 따라 잡기 힘들지만 그런중에도 확실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삶의 고통은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사람들의 신음과 아픔이 바로 그 옆사람이 안겨준 상처 때문이라는 설정이 너무도 피부에 닿아 가슴이 저리다.

"매그놀리아(목련)"는 고통의 뿌리를 제시했지만 그 해법은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화해와 용서의 미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몹쓸짓은 다 해 놓고 죽어가면서 참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편집위원 jsrim@ ked. co. 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