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고 싶었던 인생역정 고백 .. 유미리씨 에세이 '훔치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 당신은 "사랑: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란 정의에 만족하는가. 그렇지않다면 "당신만의 사전"을 만들 일이다. 사전속의 언어는 생의 총체속에 검증돼야한다"

재일교포작가 유미리(32)의 에세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민음사)는 사전아닌 사전이다. 유씨가 편집과 감수를 도맡은 이 사전엔 47개의 단어가 수록돼있다.

전화,술,비밀,욕망,야구,동성애,폐막...

작가는 작품의 "서브노트(Sub note)"가 된 단어장에서 바탕어를 뽑아 단답식 정의와 논술식 용례를 첨부했다. "둘(two)"을 보자.

표제어 설명은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세 사람이면 불륜,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종교라고 한다".

구체적인 해설로 들어가면 시소타기를 두려워했던 유년시절이 등장한다. 유씨는 모든 사람이 단 둘이 되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말한다.

자식 등 항상 무엇을 끼워야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는 지적이다.

유씨 자신은 작중인물이라는 죽은 자와 공생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와 단 둘이 있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언어에 관한 이 에세이집은 적나라한 사적 고백으로 유씨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참고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결손가정,이지메,가출,자살,퇴학,미혼모.

유씨의 인생역정은 널리 알려진 바지만 직접화법으로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뒤에서 책상을 밀어붙인뒤 머리에 지우개가루를 뿌리고 "아유 더러워, 비듬투성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초등학교 시절.

6학년땐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똥"이라고 놀림받은 뒤 두번 다시 수업중에 일어나지 못하고 교실에서 오줌을 싼다.

유부남과 바람나 집나간 어머니,별거라는 "이혼"을 택한 아버지.

중학교시절의 동성애,동가식서가숙하던 극단연구생 시절,40대 중년 남자들과의 연애,유무함몰(유두가 움푹 들어간 일종의 기형)이라는 신체적 약점,무일푼이 될때까지 써버리는 습관 등 소위 치부라는 것이 낱낱이 공개된다.

노출증이라는 비판이 왜 없을까.

하지만 유씨는 당당하다.

지저분한 과거를 팔아먹지 말라는 주장에 "나의 지난날은 작가로서 삶에 큰 자산"이라고 응수한다.

하룻밤 재워준 사람 집 열쇠가 수십개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미국에선 권총이 인구의 세배쯤 나돌고 있지만 일본에선 열쇠가 인구의 세배쯤 될 거라고 슬쩍 비틀기도 한다.

"도망:남아있기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한 일""결혼:이혼이 늘어남에 따라 더이상 인생의 무덤이 아닌 것""폐막:연극과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너무 극적이어서도 안되고 너무 썰렁해서도 안된다"등의 해설이 독특하다.

유미리씨는 연극계 최고의 기시다 희곡상과 유명한 아쿠다카와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책은 96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됐던 "사어사전을 번역한 것이다.

그는 고교1학년때 학교에서 쫓겨난뒤 항상 사전을 끼고 살았다.

유씨는 "그저 말을 좋아했다.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때마다 가슴이 설레였다"고 회상한다.

삶은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더 나은 증보판을 위해 작가는 쓰고,독자는 읽는 것 아닐까.

윤승아 기자 a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