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패 보여주고 치는 '게임'

"도이체방크는 유럽 외의 지역에서 소매은행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의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25일 도이체방크 싱가포르 지역대표사무소 재키 와이즈 대변인은 서울은행 인수의사가 전혀 없다고 한국정부에 전해왔다.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이 "내 생각엔 도이체방크가(서울은행을) 자문하다가 가져갈 것 같다"고 말한 지 나흘 만이다.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자의 여유를 보인 셈이다.

자문계약이라는 것이 어차피 서울은행의 지분을 갖는 것도 아니고 경영진을 파견하는 것도 아니다. 책임질 일이 없다.

반면 도이체방크는 유.무형의 경제적 이득을 챙길 수 있다.

자문료를 얼마나 받을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지 않을 것이라는게 금융계 추정이다. 게다가 도이체방크는 서울은행의 여신심사 위험관리 영업전략 등 핵심 부서에 실무자를 파견할 예정이다.

국내 기업의 재무정보는 물론 금융회사들의 장.단점을 수업료 한 푼 내지 않고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꽃놀이패"를 든 도이체방크는 한국 고위관료의 "매각가능성" 발언이 순진해 보였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가 국내 채권단들에 의해 조건부로 추인됐다.

국내기업의 해외매각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얘기지만 역시 "헐값매각"시비가 제기됐다.

헐값매각은 닛산의 기술을 도입한 삼성차를 인수할 상대가 닛산을 인수한 르노밖에 없는데다 조기매각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사정 때문에 스스로 협상력을 낮췄기 때문이다.

자기패를 다 드러내놓고 치는 불리한 게임이라는 점에서 삼성차매각과 서울은행 처리는 닮았다.

정부의 바람대로 서울은행이 선진금융기법을 전수받아 우량한 금융회사로 발돋움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상대(도이체방크)에 그만큼 얻어내려면 이쪽은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게 꽃놀이패를 든 쪽과 게임을 하는 자의 서러움이다.

한 나라 장관의 말이 일개 회사 지역대표사무소의 대변인에게 금세 묵살당하는 게 서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우리끼리 탓한다고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면서 은행의 바람직한 정상화가 이뤄지기를 바랄뿐이다. 이를위해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를 기대해본다.

박민하 경제부 기자 hahaha@ 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