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60) 제1부 : 1997년 가을 <5> '월 스트리트'

글 : 홍상화

"지난주 "뉴욕 타임스"지 기사에 의하면 한국도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처럼 외환위기가 닥칠지 모른다고 하던데요. 사회가 전반적으로 사치에 물들어가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섬세한 분위기의 투자 담당자가 질문을 했다.

"사실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려를 낳게 하는 상황입니다.

치졸한 졸부의 행태를 잘 나타내고 있지요.

한국민은 한국전쟁 후 연 국민소득 70달러 수준에서 40년 만에 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을 제외하고 중화상권에 속하는 싱가포르.홍콩.대만을 제외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미국을 동맹국으로 가진 덕택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 국민의 저력도 한몫 한 셈이지요.

치졸한 졸부행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으로 받아주십시오.곧 정신을 차릴 겁니다"

진성호가 미소 속에 말을 마쳤다.

"한국이 또다른 일본으로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경제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쟁상대의 대두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고 자국시장의 봉쇄와 선진국 경제에 대한 무분별한 침투로 세계경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묻는 질문입니다"

섬세한 분위기의 투자 담당자가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일본은 폐쇄성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좋은 예가 있지요.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일본에서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불교에 버금가는 종교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국의 주종 제품이 일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반도체를 예로 들더라도 한국의 반도체산업 발전이 일본의 독점을 막음으로써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유리하지요"

진성호의 논리는 여전히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투자담당자 중 비교적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투자담당자가 서류뭉치를 앞에 내놓고 뒤적였다.

겉장으로 보아 이미 제출한 대해실업의 재정상태를 나타내는 재무제표임이 분명했다.

그가 속주머니에서 미니 녹음기를 내놓더니 자기 앞에 놓았다.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에 녹음을 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은지요?"

그자가 진성호에게 물었다.

이현세는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대해실업의 재정상태에 대한 질문일 것이 뻔하고 제출한 재무제표는 진정한 의미에서 엉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자가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투자설명회 회의실은 일순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그간 대해실업의 재무제표를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과거 실적을 분석해보면 부채비율이 좀 높다는 것 외에는 좋은 경영실적이더군요.

문제는 이 재무제표의 신빙성을 국제수준으로 받아들여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 회장의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날카로운 눈매의 투자담당자의 말에 이현세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