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62) 제1부 : 1997년 가을 <6> '슬픈 연정'

글 : 홍상화

무대 위에서는 "박정희의 죽음" 뮤지컬의 연습이 진행중이었다. 텅 빈 객석 중간쯤에 홀로 앉아 있는 진성구는 무대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무대 한쪽에서는 박정희가 가운을 걸친 채 흰색 애견을 무릎 위에 앉히고 흔들의자에 외롭게 홀로 앉아 있었으며,반대쪽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경호실장에게 강한 조명이 비쳐지고 있었다.

경호실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괴롭게 앉아 있는 박정희에게 시선을 주면서 무대 중앙으로 와 누구를 안고 있듯 두 팔을 든 채 독백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나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저 외로운 노인을 안아서 침실로 옮겼었소"

경호실장은 박정희에게 보냈던 시선을 자신의 벌린 두 팔로 옮겼다.

"내 팔에 안긴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가벼웠소.이런 어린아이의 육체를 가진 자에게서 세상을 호령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소" 경호실장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두 팔을 올렸다.

"문득,이상한 생각이 들었소.개골창에 내다버려? 그리고 내가 권력을 움켜쥐어? 안 되지,아직은 안 되지.때가 오지 않았어.나는 이 나라의 제2인자,대통령의 막강한 경호실장.노인이 죽으면 그의 뒤를 이을 자가 나밖에 누가 더 있나?"

경호실장은 잠시 서성거리다가 무엇을 깨달은 듯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노인의 성욕은 노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법,노인에게 성욕을 주어라.노인에게 젊은 여인의 탄탄한 육체를 주어라"

경호실장은 주머니에서 산삼뿌리를 꺼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노인에게 산삼을 주어라"

그는 주머니에서 시바스 리갈 술병을 꺼내며 큰소리로 외쳤다.

"노인에게 독한 양주를 주어라"

그는 무대 밖으로 팔을 뻗으며 더 큰소리로 외쳤다.

"노인의 품안에 젊은 여인을 안겨주어라"

경호실장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젊은 여인 역을 맡은 김명희가 육감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호실장이 김명희의 팔을 잡아 박정희 쪽으로 밀어 보냈다.

김명희가 박정희 옆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라이트!" 하고 외치는 진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대가 환해졌다.

"김명희를 박정희 쪽으로 더 힘껏 밀어붙이세요"

진미숙이 무대 위의 배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성구는 아직도 조금전의 무대 장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망막에는 암흑 속 강한 조명에 갇힌 김명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백인홍과 성호가 한 가지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면 여자의 육체미에 대한 판단이라고 진성구는 생각했다.

"그럼 다시 한번 시작해요. 라이트 아웃"

진미숙이 말했다. 무대가 다시 캄캄해지고 경호실장 역을 맡은 배우가 김명희의 팔을 잡아 힘껏 밀쳤고,김명희는 그 힘에 밀려 박정희 쪽으로 가다 그의 발밑에 쿵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김명희가 다치지나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