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64) 제1부 : 1997년 가을 <6> '슬픈 연정'

글 : 홍상화

진성구는 극장 사무실 쪽으로 가면서 만약 백인홍이 김명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그것은 아마도 김명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출세시켜준 자신을 떠나 성호에게 달라붙은 김명희에게서 느끼는 배신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백인홍과 같이 자존심이 강한 자는 김명희의 그런 행위를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한 복수심은 배신을 한 여자뿐만 아니라 여자의 배신을 유도한 남자에게 더 큰 원한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호가 그러한 원한의 대상이라면 백인홍이 성호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무슨 목적으로 만나자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성호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백인홍을 친절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성구가 극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미는 백인홍과 악수를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낮술 서너 잔을 걸쳤는지 취기로 인해 눈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으나,대학 시절까지 야구선수 생활을 함으로써 다듬어진 우람한 체격은 7년 전 백인홍을 대하실업 하청업체 사장으로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진성구를 압도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이진범씨와는 자주 연락하시는지요?"

이진범은 백인홍과 특별히 가까운 친구 사이였으므로 진성구가 선 채로 말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리커스토어를 하며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가족도 미국으로 갔나요?"

"아직 합치지는 못했습니다. 곧 합칠 수 있겠지요"

"혹시 연락하시면 안부 전해주십시오"

이진범이 9년 전 미숙과 불륜관계를 가져 그의 분노를 자아낸 적이 있으나 이제는 두 사람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어 구원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

"진형,제가 진심으로 어려운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백형께서 원하신다면 시간을 내야지요"

백인홍이 형이라는 호칭을 써서 자신도 그렇게 했다.

그에게 될 수 있으면 친절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쉽게 답했다.

"그럼 나가시지요.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백인홍이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 사무실을 나갔다.

백인홍을 뒤따라가면서 진성구는 왠지 모르게 옛날에 접했던 백인홍의 패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확장일로를 걷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으므로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 때문은 아닐 것이고,아마도 김명희의 배신이 가져다준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극장을 나와 근처 카페로 갔다.

"진형께 묻겠습니다. 솔직히 대답해주시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백인홍이 맥주잔을 한잔 쭉 들이켠 후 말했다.

진성구가 앞에 놓인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홍이 다시 맥주를 따라 마신 후 눈을 감았다.

"그럼 솔직히 묻겠습니다. 진형께선 김명희를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진성구는 너무나 예상 밖의 질문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진성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백인홍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