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66) 제1부 : 1997년 가을 <6> '슬픈 연정'

글 : 홍상화

진성구는 경위를 간단히 설명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 백인홍의 오해가 너무 깊은 듯이 보였다.

김명희에게 직접 해명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백형,여기 잠깐 계십시오.전화 한 통화 하고 곧 오겠습니다." 진성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중전화 박스로 갔다.

김명희에게 직접 와 설명해줄 수 없겠느냐고 이혜정을 통해 부탁할 작정이었다.

버튼을 누르자 전화벨이 울렸다. 한참만에,"동숭동 소극장입니다"라는 직원의 말이 들려왔다.

"단장인데,이혜정씨 좀 바꿔요"

"단장님,방금 큰 사고가 났어요. 이혜정씨가 연습 도중 무대에서 떨어졌어요"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구? 얼마나 다쳤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어요.

앰뷸런스가 곧 올 거예요"

진성구는 전화를 끊고 백인홍에게로 갔다.

"형,연습 도중 사고가 났어요.

가봐야겠어요.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진성구가 급히 말하곤 출구로 뛰어나갔다.

백인홍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진성구가 극장 로비를 황급히 지나 객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객석 앞쪽 사람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니 이혜정이 무대 밑에 타이트 무용복을 입은 채 누워 있었다.

이혜정의 표정을 살폈다.

멍한 눈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진미숙이 이혜정의 이름을 연신 불러대고 있었고,그 옆에서 김명희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진성구는 이혜정의 머리 쪽으로 가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웃옷을 이혜정의 머리 밑에 놓으려고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했다.

"의사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도록 해요"

진성구는 멈칫하며 소리나는 쪽으로 뒤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백인홍이 서 있었다.

백인홍을 본 김명희가 잠시 놀라는 듯했다.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다 뚝 그쳤다.

곧 이어 의료진이 통로를 따라 뛰어왔다.

의사가 이혜정의 팔을 걷어 주사를 놓고 난 후 코에다 약물에 담은 솜 뭉치를 갖다대었다.

이혜정이 눈을 껌벅였다.

"어때요? 내 소리 들려요?"

의사가 말하자 이혜정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잠시 후 이혜정이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냥 그대로 있어요"

의사가 말하며 이혜정의 상체를 찬찬히 더듬었다.

"여기는 괜찮아요?"

"네" "여기는요?"

"괜찮아요"

이혜정은 이제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사의 손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 쪽으로 갔을 때 이혜정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뼈가 상했군요.

일단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엉덩이 외엔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떨어지는 순간 의식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누워 있는 이혜정의 몸을 만져보던 의사가 말했다. 의사가 신호를 보내자 의료진이 이혜정을 반듯이 누인 상태로 들것에 옮겼다.

들것을 따라 진성구와 진미숙이 뒤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