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총리남편의 출산휴가 .. 신수정 <문학평론가>

CNN 방송의 종군기자인 크리스티안 아만포는 분쟁이 잇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달려가 뉴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한 맹렬여성이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남녀 구별이 덜하며 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로 여겨지는 미국에서조차 종군기자와 여성이라는 두 단어는 썩 잘 어울리는 짝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선입견들을 불식시키고 다른 어떤 남자 기자보다도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잘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편이다.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 대변인이 4월말 대변인직을 공식 사임했다.

아이 양육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3년 동안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 정부의 입노릇을 해온 남자가 단지 아이 양육이라는 "하찮기" 그지 없는 사안을 빌미로 자신의 직을 파하고 있다.

도대체 이 남자의 마누라는 뭐하는 여자이길래 미국 정부의 대변인이라는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 양육을 도맡아야 하는 걸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한 셈이다. 대변인보다 더 "바쁜" 직업을 가진 여자라는 것.

그녀는 바로 크리스티앤 아만포다.

루빈이 대변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국무부 브리핑 룸의 연단에 오르던 날 기자단 좌석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아만포 기자는 남편으로부터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받아내려고 시도했다. 아이 양육을 위해 직업을 내던진 남자 루빈은 언제나처럼 애매모호한 외교성 발언으로 일관했다.

"나는 필요하고 적절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오"

기자들은 박장대소하며 그에게 딸랑이와 모빌 등 아기 선물을 잔뜩 안겨주었다.

외신들은 아만포 기자가 "최고의 보모"를 구했다고 전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현역 변호사이며 영국 총리의 부인인 체리 블레어는 퍼스트 레이디보다 여권 운동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찍이 블레어를 다우닝가 1번지에 입성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선거 참모이자 평생 동지이기도 한 그녀는 "영국의 힐러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영국 여성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여성"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유는 단 하나.

가정(아이)과 일 가운데 어느 하나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운동가로서의 그녀의 면모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최근 45세가 된 체리 블레어의 네번째 출산을 앞두고 온 영국이 떠들썩하다.

그녀가 남편 토니 블레어에게 출산 휴가를 받아 육아를 도와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그녀와 함께 출산 휴가를 받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여부를 놓고 목하 고민중이다.

말하자면 "일국의 총리가 사생활을 문제로 휴가에 돌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입장과 "아무리 일국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라 하더라도 그 역시 집에 들어가면 평범한 가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역시 다른 모든 가장들과 마찬가지로 출산 휴가를 갈 권리가 있다"라는 입장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체리 블레어는 라 포넨의 예를 들며 영국의 총리 역시 마찬가지임을 강조한다.

리포넨 핀란드 총리는 지난 98년 26세 연하의 재혼한 부인이 아기를 낳자 출산 휴가를 받은 적이 있다.

얼마전 부인이 또 다시 딸을 낳자 "법이 정한 권리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다"면서 그는 다시금 휴가를 받기도 했다.

체리 블레어 주장의 핵심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신은 "퍼스트 레이디" 이전에 한 남자의 아내로서 법이 정한 권리를 향유하는 데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너무나 머나먼 남의 일로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엘리트 여성들이 가정 생활권과 육아권마저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한 사회가 한 여성의 사회생활을 보장함과 동시에 가정과 아이에게 충실한 권리 역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겐 얼마나 낯선가.

비록 그것이 몇몇 특별한 여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한 사회가 여성에게 보장해야만 하는 권리의 외연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가신 월권 행위는 이미 당연한 권리의 요구다.

오해의 여지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남자가 자신의 일을 접고 출산휴가를 받아 여성의 가사노동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회가 여성의 사회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녀의 생명 보전력에 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싸움의 가장 1차적인 단계가 "유명한 남편"에 관한 사회 전체의 상식적인 판단 뒤집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ssj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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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문과 졸업
경원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