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68) 제1부 : 1997년 가을 <6> '슬픈 연정'

글 : 홍상화

"혜정아,마음에 두고 있는 단원이 누구야? 가능하면 네 말대로 해볼게" 진미숙이 이혜정을 향해 말했다.

"김명희야"

이혜정의 말에 진성구가 홱 돌아앉았다. 그리고 이혜정을 무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김명희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여자예요.

그런 배우는 찾기 힘들 거예요. 재능은 타고나야 하는데 김명희는 놀라운 재능을 타고났어요.

아마 영화감독이셨던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 같아요.

거기다가 놀라운 체격 조건을 갖췄어요. 아마 그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이혜정을 진성구는 화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김명희가 이 뮤지컬의 여가수 역할을 맡으면 이혜정의 예상대로 뮤지컬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동시에 김명희를 뮤지컬계의 스타로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가 조금 전 본 그녀의 연기력과 몸매가 그토록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성구는 문득 김명희의 스타탄생이 그녀와 그녀 주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해졌다.

모든 명성이 그러하지만,특히 대중예술 분야의 명성은 지나친 부와 마찬가지로,명성을 얻은 인간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을 부패하게 하며 인간을 더욱 외롭게 하리라는 것을 진성구는 알고 있었다.

그런 명성을 얻은 김명희는 어느 한 남자,특히 성호와 백인홍 같은 한 남자의 전유물이 아닌 뭇남성의 공유물이 될 것이며,아마도 그것이 김명희라는 여자의 타고난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진성구는 생각했다.

앰뷸런스는 서울대병원 후문을 막 들어서고 있었다.

"김명희씨를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볼게"

진성구가 진미숙에게 말했다.

"그러면 혜정이는 뭘 할 거야?"

진성구가 이혜정에게 물었다.

"가정으로 돌아가야지요.

제 사랑을 기다리는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거예요"

이혜정이 미소 속에 말을 이어갔다.

"성구오빠가 얘기했잖아요.

자연과 역사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요.

자연과 역사가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먼저 역사를 찾아갈 거예요.

피라미드에서,루브르박물관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 다음은 자연을 찾아가서 그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요.

그 다음엔 아이를 가질 거예요.

.미숙아,내 나이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겠지?"

"그럼,물론이지.마흔이 넘어서 아이를 갖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진미숙이 이혜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성구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이혜정이 갖고 싶어하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혜정이 무대를 떠나 아이를 갖는다면 그에게서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알고 있었다.

이혜정이라는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인생..

그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것은 세월이 빨리 흘러가 버리기만을 기원하는 인생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앰뷸런스는 병원현관에 도착했고 차 뒷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