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83) 제1부 : 1997년 가을 <8> '정복자들'

글 : 홍상화

백인홍이 대해직물의 공장과 생산시설 일체를 인수하기로 결정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백인홍은 지난 사흘 동안 47세라는 나이를 잊어버리고 30대 초반의 청년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인수자금 확정을 위한 경리실사 작업 준비를 위해 대해직물로부터 받은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회사의 경리담당 이사의 중간 보고에 의하면,대해직물에서 제시한 자산과 부채 액수는 비교적 정확하다는 것이었으므로 큰 장애는 없을 듯했다.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은 세 가지로 집약되었다. 첫째로 잠정합의된 인수자금 800억 원의 자금을 조달하는 것과,둘째로 생산공장과 시설을 담보로 잡고 있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채무자 변경에 관한 동의를 받아내는 것과,셋째로 고용승계에 따른 노조측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었다.

금융기관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대해실업측에서 적극개입하여 형식적으로 차입금의 일부를 일시 상환하든지,추가담보를 집어넣는 것으로 합의될 듯했다.

노조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에 대해서도10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노동계도 들떠있는 분위기라 자칫 골치 아픈 문제로 비화할 수 있으나 작전을 잘 짜면 별 문제 없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권혁배 의원이 이 거래를 성사시킨 장본인이므로 일이 꼬이면 그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 것이고,또 권 의원이 추천한 최형식을 중역으로 영입하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했으므로 앞으로는 그의 역할에 기대볼 만도 했다.

인수자금 조달 계획에 있어서는 우선 절반 정도는 백운직물 명의로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은 액수도 문제지만 그것보다는 제2금융권의 금융기관들이 근자에 와서 해외 단기자금의 유입이 급격히 감소하였으므로 전과 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수자금의 나머지 절반은 백운직물이 보유하고 있는 매장을 매각하여 마련할 계획이었다.

전국 주요도시의 요지에 매장을 소유하고있었으므로 현시가로 따진다면 인수금액의 반은 충당할 수 있을 듯했다.

백인홍은 호텔의 일식당 룸 안에서 권력자의 사돈인 윤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명동과 부산광복동에 있는 매장을 매각하기 위해 한국 굴지의 백화점 체인을 소유하고 있는 재벌그룹의 중요 인사인 윤 회장과 점심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전 전화로 매매 물건에 대해 의사를 타진했고,그쪽에서도 관심을 보여 팩스로 매매물건에 대한 자료를 즉시 보내주었으므로 오늘은 좋은 소식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 오셨습니다,라는 말과함께 웨이트리스가 문을 열었다.

윤 회장이 모습을나타냈다.

마지막으로 만난 2년 전보다는 많이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선배님,너무 오랫동안 적조했습니다"

백인홍이 윤 회장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면서인사를 했다.

"사업이 확장일로에 있다면서,또 무슨 사업을 하려고 그 좋은 물건을 처분하려고 해"

상좌에 앉으면서 윤 회장이 말했다.

"이제 제대로 된 사업을 해보려고요" "제대로 된 사업은 어떤 사업이야? 지금 백 사장이 하고 있는 사업이면 최고지"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대화는 포도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면서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