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벽초 문학비 복원

"내가 문학에 눈뜰 무렵 많이 읽은 시들은 임화 백석 오장환 이용악 같은 이들의 것이었다. 소설로는 이태준 김남천 현덕 이기영 박태원등을 주로 읽었다. 그러나 막상 문학의 맛을 좀 알때쯤 되니까 이들이 모두 읽어선 안되는 문학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들조차 학교 도서관 책방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시인 신경림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 문학사는 오랫동안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납북과 월북의 경계가 모호하고 월북 또한 피치못할 사연때문인 경우가 많았음에도 6.25이후 북행작가는 물론 재북작가 작품까지 일괄삭제함으로써 학자들마저 한국문학의 체계를 제대로 파악할수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분단예술사의 맥이 이어지게 된 건 1987년 납.월북작가에 대한 해금발표에 이어 88년 이들의 광복전 작품 출판이 허용되면서부터.

읽는건 물론 거론조차 금기시되던 작품들이 출간되면서 작가에 대한 복원작업도 시작됐다. 정지용의 "향수"는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노래로 되살아났고 백석과 임화는 문단의 주연구대상으로 떠올랐다.

89년초 "월북작가 대표문학"전집이 간행됐고 잇따라 최서해 박태원 이태준등에 대한 재조명도 이뤄졌다.

94년 이태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38년작)이 나온 뒤 구보씨는 무기력한 소시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벽초 홍명희 또한 옛명성을 되찾았다.

홍명희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3재로 불렸으나 48년 월북하는 바람에 문학사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해금 이후 "임꺽정"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벽초 홍명희 연구"(강영주)라는 본격적 평전까지 나왔다.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따라 98년10월 충북 괴산에 건립됐다가 보훈단체의 반발로 철거됐던 홍명희문학비가 다시 세워지리라 한다.

예술도 좋지만 북한의 내각부수상까지 지낸 사람의 문학비는 곤란하다며 반대해온 보훈단체들이 마침내 용서와 화합의 손을 내민 셈이다.

바른 문학사의 복원과 실종문인의 복권은 민족동질성 회복의 첫걸음이라 할수 있다.

홍명희문학비 복원이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와 구원을 씻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