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90) 제1부 : 1997년 가을 <8> '정복자들'

글 : 홍상화

"회사채 발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도만용이 제때에 물어주었다.

"생각처럼 쉬운 것 같지 않아요.

제2금융권에서 선뜻 나서지 않아요"백인홍이 말했다.

"외환위기설이 나돌고 있으니 선뜻 나서지 않겠지.종금사에서 회사채 보증은 해주어야 하나?"

"네,보증을 해주고는 회사채의 많은 부분을 종금사 자체에서 인수하지요. 금년 초만 하더라도 종금사에서 회사채를 발행하라고 권유하면서 다녔었어요.

외국에서2,3년짜리 단기자금은 남아 돌아갔으니까요"

"해외 단기자금이 왜 남아돌아가지?" "장기 투자처를 찾는 동안 자금이 남아도는가봐요.

그래서 연 이자도 1퍼센트 정도 싸지요"

"이자가 싸다고 단기자금을 무턱대고 좋아하다가 큰 문제 생기는 것 아니야?"

"지금 벌써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요새 시중에 외환위기설이 돌고 있는데 낭설이겠지요?"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OECD총장이 한국에 외환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을 했대.어떻게 넘어가겠지 뭐.과거에도 위기설이라는 게 현실화된 적이 있었어?"

도만용이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과거 그가 재무관료 제위기를 헤쳐나간 사례를 흥분한 어조로 설명하며 현 경제각료의 실정을 낱낱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도만용의 말을 들으면서 백인홍은 그가 뛰어난 자기 PR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 정도의 능력이면 과거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입각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만용은 장관이라는 직책을 마치 자신의 직업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고 장관직에 임명되는 노하우가 상당히축적된 듯했다.

권력자를 볼 기회가 오면,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역사를 바꾸는 데는 한 사람만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각하십니다"라고 할 것이고,권력자는 눈물과 "역사를 바꾼다"는 말에 쉽게 감동돼서 그에게 또다시 기회를 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였다.

도만용의 얘기가 끝나자 백인홍은 얼른 회사채 보증을 협의하고 있는 여덟 개 종금사와 최고 경영자 이름이적힌 리스트를 도만용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도만용은 쭉훑어보더니 종금사의 최고 경영자들 대부분이 과거 재무부 재직시에 부하직원이었거나 과거 자신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커미션은 어느 정도 선에서 얘기할까?"

도만용이 커미션을 무슨 서비스에 대한 정식 수수료인 양 당연한 투로 물었다.

역시 도만용답다고 백인홍은 감탄했다.

"뭐 장관님이 알아서 하시지요"

백인홍은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으나 곧 마음이 불안해졌다.

워낙 배포가 큰 친구라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도만용은 리스트를 든 채 고개를 젖히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0.5퍼센트 정도면 너무 큰가?"

도만용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백인홍은 계산을 했다.

회사채 총액 400억의 0.5퍼센트는 2억원을 의미했다. 보통때 같으면 회사채를 발행하는 데 드는 커미션이 필요 없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