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아버지와의 데이트 .. 강규 <소설가>

강규

6월의 어느 휴일,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초여름날이다. 아버지가 대문을 나서며 내게 신호를 보낸다.

"집 앞으로 나와라"

초여름날 길가에는 나뭇잎들이 신록의 양산처럼 펼쳐져 있다. 나는 "아빠 어디 가요?" 애교를 떨거나,"아빠 이거 사줘요,저거 사줘요" 조르지 않았다.

그저 과묵한 아버지처럼 이런저런 말을 감추며 상쾌하게 걷고 있을 뿐.

아버지는 생각난 듯 말씀하신다. "숙제는 다했니?"

"네"

"요즘 엄마 말씀은 잘 듣니?" "...아뇨"

"그럼 안되지"

"..."

"잘 들을 거지?"

"네"

나는 모범생처럼 고분고분 대답한다.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으시던 아버지는 로터리를 건너자고 하신다.

으흠 자장면집에 가는구나.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면 오래된 중국식당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로터리 근처 낯선 일식집으로 데려가셨다.

"이 집 생선초밥 맛있다"

댓잎이 그려진 나무발에 일본부채로 장식된 벽면,단정한 좌식 의자.

아버지와 마주앉은 일본식당 창가로 6월의 생기발랄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아버지는 이따금 붉게 저민 생강을 내 숟가락 위에 얹어 주셨다.

그리곤 다시 아무 말도 없으셨다.

어린 내가 저 말없는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할 리 없다.

하지만 어떤가.

언니도 남동생도 아닌 못생긴 둘째,바로 나를 데리고 나와 초밥을 사주신 아버지와 마주앉아 그날 나는 무척이나 의젓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생각난 듯 물으신다.

"아이스크림 사줄까?"

나는 얌전히 고개만 끄덕끄덕.

우리 부녀는 콘을 빨며 눈부신 신록의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후 우리 남매가 성년이 되기 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으셨을까.

어린 나는 또 무슨 즐거움이 그렇게 많아 그날 숲의 새처럼 지저귀는 마음이 되었을까.

그때 6월 초여름 아버지와 데이트하던 날의 은은하고도 흡족한 기쁨...

아버지가 내 곁에 없던 나머지 날들은 그 추억의 힘을 빚처럼 빌려다 썼다. 그때,말없이라도 아버지가 곁에 계셔 어린 내 걸음을 맞춰주시던 그날이 오늘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꼭 요즘 같은 6월의 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