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우리 문화의 위선과 맹목 .. 이광호 <문학평론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혼돈의 시대라고 한다면,그 혼돈의 가장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양상은 문화적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혼란의 사태는 일상의 모든 국면에서 벌어지며,나날의 삶 속에서 모든 선택의 문제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떻게 쉴 것인가,그리고 어떻게 일하고 즐길 것인가,혹은 어떤 대중문화를 향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서의 혼란이다.

최근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그 혼돈을 배가시키는 듯한 두가지 사실이 보도됐다.

하나는 일본대중문화의 추가 개방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거짓말"에 관한 검찰의 무혐의 결정이다.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일본의 저질대중문화가 무차별적으로 유입돼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한 대중문화가 홍수를 이루는 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그것이다.

그 걱정은 물론 전혀 무의미한 걱정은 아니지만,우리의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생산적인 걱정은 아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 문화의 체질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만 한다.

한국문화의 체질에 관한 문제는 거칠게 말하면 두가지 논점에서 말해질 수 있다.

우선은 위선의 구조이다. 일본대중문화의 개방과 "거짓말"의 무혐의 처분은 사실 이와 같은 문화상품을 접해본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당국에서 허용하지 않아도 이미 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매체가 금지하고 있는 것들을 가공할 속도로 확산하는 공간이 됐다.

일본대중문화의 마니아들은 벌써 그것들의 정수를 상당 부분 체험하고 있으며,포르노의 바다인 인터넷을 놀이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거짓말"의 노출은 그다지 충격을 줄 수 없는 수준이다.

음성적으로는 모든 것이 용인되고 유통되는데도 제도적으로는 모든 것이 금지돼 있는 이 기이한 구조.유교적인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그 뒷면에서는 퇴폐적 문화가 범람하는 이 이중적 사회구조가 위선의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문제는 대중문화에서의 맹목의 구조다.

대중문화가 기존 엘리트 문화의 엄숙주의와 폐쇄성에 대항하여 문화의 다양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고,시민사회에서의 필연적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문화는 문화의 다양성을 증대하기보다는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유행상품을 양산하는 데 급급하다.

젊은이들이 어떤 특정한 스타일의 가방을 매기 시작하면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 가방을 매고 다니고,머리를 물들이기 시작하면 모든 젊은이들이 머리를 물들이는,"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수용자들의 비주체적인 스타일의 획일화가 이루어지는 현실...

독창적이고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일본과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모방에 급급한 상황.대중문화 생산자들은 철저히 눈앞에 보이는 시장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고,고급문화의 생산자들은 보수적인 예술 이념에 안주해 있는 사태...

이런 상황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그 다채로움을 상호 인정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대중문화의 개방과 "거짓말"과 같은 영화의 범람을 걱정하는 것은 사태의 근본에 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문화의 깊이와 다양성이 동시에 제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것은 열린 시민사회의 건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어떤 문화적 표현도 용인되지만,어떤 문화적 경향도 우리를 획일화시킬 수 없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다양성과 민주적 시스템이 자본과 이념이 공모하여 만들어내는 위선과 맹목의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그 사회는 물론 완벽하게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다 하더라도 지금 보다는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 권리가 있다.

over82@seoularts.a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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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국문과 박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평론집 "위반의 시학""환멸의 시학""소설은 탈주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