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몽골의 '姓氏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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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성을 간다"는 것이 큰 죄가 된다.
맹세할 때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이면 성을 갈겠다"고 한다. 성은 출신가문의 명예를 뜻할뿐 아니라 이름과함께 개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 이래 성불변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온 데서 생겨난 의식의 표현이다.
양자를 가거나 시집을 간다해도 성을 바꾸는 일은 없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이나 귀족들이 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초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편화 됐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한 토성분정정책의 결과였다. 성씨사용은 당초 왕실에서 시작, 귀족 관인 양민 천민의 순으로 확산돼 갔다.
조선조에는 더 보편화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두 2백50여성,"동국여지승람"에는 2백77성이 수록 돼 있다.
1909년 새 "민적법"이 시행돼 노비까지 성을 가졌으나 일제 때인 1930년 인구조사에도 2백50여성이었다. 그뒤 남한에만 2백58성(60년),2백49성(75년),2백74성(85년)이 조사됐다.
일제의 1940년 창씨개명강요는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이었다.
그때 각 문중에서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을 지키려 했던 저항의식은 눈물겹다.
이가 김본식으로 성을 표시했는가 하면 수원 광산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쓰기도 했다.
"내 대에와서 성을 가니,나는 개자식이다"해서 이누코라고 창씨를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남녀평등을 위해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일부 여성운동가들이 있는 요즘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성을 아예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지 모르겠다.
1921년 공산혁명으로 성씨를 강제로 없앴던 몽골이 최근 개방바람을타고 80년 만에 성씨찾기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행정적불편은 물론 근친혼이 예사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혁명은 성공할 수 없는 모양이다.
맹세할 때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이면 성을 갈겠다"고 한다. 성은 출신가문의 명예를 뜻할뿐 아니라 이름과함께 개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 이래 성불변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온 데서 생겨난 의식의 표현이다.
양자를 가거나 시집을 간다해도 성을 바꾸는 일은 없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이나 귀족들이 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초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편화 됐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호족들에게 성씨를 부여한 토성분정정책의 결과였다. 성씨사용은 당초 왕실에서 시작, 귀족 관인 양민 천민의 순으로 확산돼 갔다.
조선조에는 더 보편화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두 2백50여성,"동국여지승람"에는 2백77성이 수록 돼 있다.
1909년 새 "민적법"이 시행돼 노비까지 성을 가졌으나 일제 때인 1930년 인구조사에도 2백50여성이었다. 그뒤 남한에만 2백58성(60년),2백49성(75년),2백74성(85년)이 조사됐다.
일제의 1940년 창씨개명강요는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이었다.
그때 각 문중에서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을 지키려 했던 저항의식은 눈물겹다.
이가 김본식으로 성을 표시했는가 하면 수원 광산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쓰기도 했다.
"내 대에와서 성을 가니,나는 개자식이다"해서 이누코라고 창씨를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남녀평등을 위해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일부 여성운동가들이 있는 요즘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성을 아예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지 모르겠다.
1921년 공산혁명으로 성씨를 강제로 없앴던 몽골이 최근 개방바람을타고 80년 만에 성씨찾기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행정적불편은 물론 근친혼이 예사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혁명은 성공할 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