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산가족 상봉] 목놓은 思母曲 .. '北 유명인사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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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코엑스(COEX) 아셈 컨벤션센터에서 2시간30분간에 걸쳐 진행된 혈육상봉에는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서울방문단중 예술.과학계를 대표하는 유명인사 10여명도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남쪽의 혈육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특히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딸을 만난 인사들은 50년 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통곡했다.
.김일성대학 교수인 조주경(68)씨는 남쪽에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신재순(88.부산시 서구 서대신동 3가 내원정사)씨를 만나 반백년만에 "사모곡(思母曲)"을 목놓아 불렀다.
조씨는 50년 세월의 흔적과 한으로 깊게 주름잡인 어머니의 얼굴과 손을 어루만지며 "어머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흐느꼈다.어머니 신씨는 죽을 줄로 알았던 아들의 장성한 모습에 감격, 한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신씨는 "죽은줄 알았는데..., 훌륭히 자라줘 너무 고맙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환갑을 훨씬 넘긴 아들을 얼싸 안고 떨어질줄 몰랐다.
아들 조씨는 지난 50년 서울대 재학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면서 어머니와 생이별했다..공훈과학자 칭호를 받은 조용관(78)씨는 상봉신청을 했던 남쪽의 아내 김부선씨가 이미 사망, 끝내 볼 수 없게 되는 비운을 겪었다.
여동생 옥순(77.전북 임실군 오수면)씨가 "이게 얼마만이냐"고 말문을 열었으나 용관씨는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옥순씨가 "어떻게 살아왔어. 참말 맞긴 맞은 거지. 경제좀 봐. 어 딸도 몰라보고"라며 용관씨에게 딸을 소개하자 용관씨는 "네가 경제구나. 아이고 야 경희구나. 장군이 돌봐주셨다"라며 감격했다.용관씨는 그러나 아내가 지난 67년 병으로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반세기만에 만난 오빠에게 올케의 사망소식을 전해준 옥순씨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용관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다.
용관씨는 방직분야 전문가로 북한 경공업분원 방직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북에서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오영재(64)씨는 동생인 형재(62.서울시립대 전산통계학과 교수), 근재(59.홍익대 조형대학장)씨와 형 승재(67.전 한남대 수학과 교수) 등 헤어진 형제들을 만나 50년 한을 풀었다.
그러나 형제들과 만난 기쁨도 잠시.
영재씨는 남쪽의 형제들로부터 어머니가 5년전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참아왔던 울음보를 터뜨렸다.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시를 쓰고 술만 먹으면 어머니 생각에 동요 "따오기"를 즐겨 불렀던 그였기에 슬픔은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재씨는 "어머니, 불효자식 영재가 왔습니다"라며 통곡했다.
형재씨는 "어머니는 생전에 "영재도 없는데 뭐가 좋다고 사진을 찍겠냐"며 한사코 사진기 앞에 서지 않으셨다"면서 "5년만 더 사셨더라면 꿈에도 그리던 형을 만나셨을텐데."라며 울먹였다.
전남 강진 국립농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영재씨는 지난 50년 전쟁중 의용군으로 차출되면서 소식이 끊겼다.
.인민화가 정창모(68)씨는 여동생 춘희(61.경기도 군포시 수리동), 남희(53.전북 전주시 효자동)씨 자매와 해후했다.
춘희씨는 "오빠가 보고 싶어 일본까지 가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림들을 모아왔다"면서 무정한 세월을 원망했다.
남희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는 오빠를 잃은 고통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사신 날이 없었다"면서 흐느꼈다.
창모씨는 "못난 자식놈 때문에 어머니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됐다"면서 흐느꼈다.
북한 최고의 미술 창작사인 만수대창작사 조선화 창작단 화가로 활약중인 창모씨는 지난 77년 공훈예술가, 88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
은 북한의 대표적인 화가다.
.북한 인민배우 박섭(74)씨와 막내 동생 병련(63.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만나자 마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병련씨 가족을 소개받은 박섭씨는 "미안하다.
내가 재수씨 이름도 모르고 조카들 이름도 모른다. 13살에 헤어져 이게 몇년만이냐"며 눈시울을 적셨다.
박씨는 북한에서 뛰어난 배우로 인정받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지난 70년대부터 조선번역영화제작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비날론"의 발명자인 고 리승기 박사의 미망인인 황의분(84)씨는 조카 황보연(62.한양대 체육학부 교수), 옥연(65.여)씨 등과 만났다.보연씨는 "고모. 혼자 가라 해놓고 얼마나 걱정했어요"라고 물었고 의분씨는 "그래 걱정 많이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북쪽에서 내려온 서울방문단중 예술.과학계를 대표하는 유명인사 10여명도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남쪽의 혈육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특히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딸을 만난 인사들은 50년 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끝내 참지 못하고 통곡했다.
.김일성대학 교수인 조주경(68)씨는 남쪽에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신재순(88.부산시 서구 서대신동 3가 내원정사)씨를 만나 반백년만에 "사모곡(思母曲)"을 목놓아 불렀다.
조씨는 50년 세월의 흔적과 한으로 깊게 주름잡인 어머니의 얼굴과 손을 어루만지며 "어머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흐느꼈다.어머니 신씨는 죽을 줄로 알았던 아들의 장성한 모습에 감격, 한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신씨는 "죽은줄 알았는데..., 훌륭히 자라줘 너무 고맙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환갑을 훨씬 넘긴 아들을 얼싸 안고 떨어질줄 몰랐다.
아들 조씨는 지난 50년 서울대 재학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면서 어머니와 생이별했다..공훈과학자 칭호를 받은 조용관(78)씨는 상봉신청을 했던 남쪽의 아내 김부선씨가 이미 사망, 끝내 볼 수 없게 되는 비운을 겪었다.
여동생 옥순(77.전북 임실군 오수면)씨가 "이게 얼마만이냐"고 말문을 열었으나 용관씨는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옥순씨가 "어떻게 살아왔어. 참말 맞긴 맞은 거지. 경제좀 봐. 어 딸도 몰라보고"라며 용관씨에게 딸을 소개하자 용관씨는 "네가 경제구나. 아이고 야 경희구나. 장군이 돌봐주셨다"라며 감격했다.용관씨는 그러나 아내가 지난 67년 병으로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한 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반세기만에 만난 오빠에게 올케의 사망소식을 전해준 옥순씨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용관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다.
용관씨는 방직분야 전문가로 북한 경공업분원 방직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북에서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오영재(64)씨는 동생인 형재(62.서울시립대 전산통계학과 교수), 근재(59.홍익대 조형대학장)씨와 형 승재(67.전 한남대 수학과 교수) 등 헤어진 형제들을 만나 50년 한을 풀었다.
그러나 형제들과 만난 기쁨도 잠시.
영재씨는 남쪽의 형제들로부터 어머니가 5년전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참아왔던 울음보를 터뜨렸다.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시를 쓰고 술만 먹으면 어머니 생각에 동요 "따오기"를 즐겨 불렀던 그였기에 슬픔은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영재씨는 "어머니, 불효자식 영재가 왔습니다"라며 통곡했다.
형재씨는 "어머니는 생전에 "영재도 없는데 뭐가 좋다고 사진을 찍겠냐"며 한사코 사진기 앞에 서지 않으셨다"면서 "5년만 더 사셨더라면 꿈에도 그리던 형을 만나셨을텐데."라며 울먹였다.
전남 강진 국립농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영재씨는 지난 50년 전쟁중 의용군으로 차출되면서 소식이 끊겼다.
.인민화가 정창모(68)씨는 여동생 춘희(61.경기도 군포시 수리동), 남희(53.전북 전주시 효자동)씨 자매와 해후했다.
춘희씨는 "오빠가 보고 싶어 일본까지 가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림들을 모아왔다"면서 무정한 세월을 원망했다.
남희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는 오빠를 잃은 고통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사신 날이 없었다"면서 흐느꼈다.
창모씨는 "못난 자식놈 때문에 어머니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됐다"면서 흐느꼈다.
북한 최고의 미술 창작사인 만수대창작사 조선화 창작단 화가로 활약중인 창모씨는 지난 77년 공훈예술가, 88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
은 북한의 대표적인 화가다.
.북한 인민배우 박섭(74)씨와 막내 동생 병련(63.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만나자 마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병련씨 가족을 소개받은 박섭씨는 "미안하다.
내가 재수씨 이름도 모르고 조카들 이름도 모른다. 13살에 헤어져 이게 몇년만이냐"며 눈시울을 적셨다.
박씨는 북한에서 뛰어난 배우로 인정받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지난 70년대부터 조선번역영화제작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비날론"의 발명자인 고 리승기 박사의 미망인인 황의분(84)씨는 조카 황보연(62.한양대 체육학부 교수), 옥연(65.여)씨 등과 만났다.보연씨는 "고모. 혼자 가라 해놓고 얼마나 걱정했어요"라고 물었고 의분씨는 "그래 걱정 많이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