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 상봉] 잠 못든 마지막 밤 .. '사흘째 표정'

''짧은 만남뒤 긴 이별이 오지 않을까''

50년 세월이 너무 길었다.호호백발이 돼 거동조차 힘든 모습으로 나타났던 어머니와 그 자식들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하는 근심으로 서울과 평양의 마지막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북 양측 방문단에 포함된 90세이상 고령자 가족은 짧기만한 여름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17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1609호.북의 아들 조진용(69)씨와 그의 어머니 정선화(95)씨는 또 만났다.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마치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듯 숙연하기만 했다.

노모는 고혈압과 노환탓에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다.정씨는 지난15일 단체상봉때 재회의 충격으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응급처치를 받았을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조씨는 "오마니,셋째 진용입니다.떨디말고 가만 계십시오"라며 울먹였다.

노모는 아들이 안쓰러운듯 "그래 그래,어지러워서 그래.계속 잘 살아라"며 안심시켰다.조씨는 경건한 표정으로 이번 모친과의 극적 상봉에서 느낀 심정을 짤막한 글로 담았다.

''어머니,이 아들 떠나보낼 때 얼마나 슬프셨습니까.이마의 깊은 주름은 어인 일이오까.백수 천수 하십시오,어머니…(중략)''

노모는 안타깝게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듯 "그래,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답했다.

조씨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어머니의 맥박을 짚어본 뒤 기자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밝혔다.

"저는 조선 중앙방송위원회 드라마 작가입니다.5형제 가운데 저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전쟁 끝나고 북에 가서 다시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해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조씨는 이어 노모가 북에 있는 셋째 며느리에게 준 것이라며 금반지를 꺼내 보이면서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 해도 조선민족의 비극적인 삶을 글로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에서 온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앰뷸런스 상봉''이란 극적 상황을 연출해야 했던 남의 어머니들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들을 다시 북으로 떠나보내면서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95세의 민병옥(충남 천안시 쌍용동)씨와 아들 박상원(65)씨 모자.지난 50년 지독히도 어려웠던 가난 탓에 오빠집에 맡겨 놓았던 아들이 의용군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생이별 하게 된 이들 모자는 평생 가슴에 멍에를 지고 살아왔다.

병세가 악화돼 단체상봉장에 나가지 못했던 민씨는 당국의 배려로 구급차로 워커힐호텔을 찾아가 가까스로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구급차 상봉 모자인 박성녀(91·충북 청주시)씨와 려운봉(66)씨도 다시 기약하지 못할 아쉬운 이별을 해야했다.

평양방문단중 최고령자인 강기주(91·서울 도봉6동)씨도 상봉의 감격을 뒤로 한채 평양에서 마지막 밤을 지냈다.

강씨는 "둘째아들 경회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믿지 않았습니다만 직접 만나고보니 오래 살기를 잘했다"면서도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눈시울을 훔쳤다.

평북 영변군이 고향인 강씨는 "1·4후퇴 당시 동네사람들과 함께 피란오다가 너무 춥고 길도 멀어 9살 난 경회를 청천강 인근 친척집에 맡겨두었다"고 이별당시를 회고했다.

강씨는 아들을 만난 평양에서의 사흘을 죽는 날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감격적인 상봉이후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는 강씨는 그러나 "내일이면 또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아프지만 아들이 북한에 잘 살고있어 한편으로 마음이 놓인다"고 담담히 밝혔다.

강창동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