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恨을 넘어야 미래가 보인다..김병주 <서강대 교수>

김병주

서울과 평양에서 마련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의 눈물바다를 보면서 한민족 정서의 밑바닥을 생각케 된다.우리의 독특한 정서는 무엇인가.

그것을 단음절의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정(情)과 한(恨)을 선택하는데 주저할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무엇이 정이고,무엇이 한인가.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 사귐이 오래감에 따라 깊어 가는 친근감,그래서 상대방을 염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정이라 한다면,사람관계에서 일어난 지난 일이 원망스럽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맺힌 것을 한이라 한다.

이 두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어서 굳이 한국적이라 말할 수 없다.

정이란 느낌을 확대하면 가족사랑 이웃사랑 민족애 인류애로 발전한다.이처럼 정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굳혀주고 사회생활의 번거롭고 어려운 일의 느낌을 경감하고,양보하고 인내하는 정신을 길러주는 긍정적 효과를 가진다.

한이란 감정 역시 공동체 생활에서 이따금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유쾌한 경험의 느낌을 말이나 행동으로 발산해 풀어내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한은 흔히 구성원간의 적대감을 심화시켜 공동체의 결집력을 훼손시키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제 실수,제 노력 부족을 덮고 남의 탓으로 돌려 마음속내 응어리로 품는 것도 한이라 한다.

한을 품은 사람은 흔히 공동체의 어떤 윤리 도덕 기준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행동거지를 하고도 한풀이 한 셈으로 돌린다.

우리 사회의 독특한 점은 정과 한이라는 두 감정의 무절제한 표출을 미화하는 경향에 밀려 정부가 사회질서의 훼손을 방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사회는 한을 양산하는 사회였다.

경직된 반상(班常)제도,적서(嫡庶)차별,남녀 차별 등이 한의 씨앗이었던 반면,이같은 한을 어느 정도 중화시켜 전통사회의 존속을 가능케 한 것이 정이었다.

한은 법과 관습으로 위장된 강압의 위세에 억눌려 응어리가 깊어지기도 했지만,신분의 경계를 넘어 작용한 정의 부드러움 때문에 소외계층의 한의 서슬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궂은 일을 운명 탓(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체념사상이 하층민에 확산돼 있었던 것도 사회 안전판 구실을 했다.

근대 산업사회화에 따라 한의 온상이던 반상과 적서의 구별이 철폐되고,남녀평등도 급진전됐다.

산업사회는 생산 및 분배문제를 시장경쟁으로 풀어가는 사회라는 점에서 세습적 신분계급에 따라 직업(즉 생산 및 분배 몫)이 결정되던 전통사회와 구별된다.

바로 이점에서 산업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한을 잉태하게 했다.

즉 시장경쟁에서 낙후한 계층이 갖게 되는 불만족을 말한다.

전통사회의 해묵은 한은 세습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품을 수 있는,따라서 정당성이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근대사회의 새로운 한은 경쟁에서 뒤처진 계층의 자기합리화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경기규칙의 공정성,경쟁의 초기조건(재산상속 등)의 공평성을 보장함으로써 참여자들이 시장경쟁의 결과에 승복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다.

우리사회의 문제는 우선 경쟁이 공정하게 치러지기에 적합한 여건조성이 미흡하다는 데 있다.

재산상속관련 법규에 회피할 구멍이 아직 많은 것으로 보도된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전통사회를 지탱했던 운명론이 물러난 자리에 뿌리 내린 산술 평균적 평등사상이다.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고,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람직한 진취사상이지만,성취를 위해 자기가 할 노력을 게을리 하고 앞서가는 남의 발을 걸고 넘어지는 성향이 팽배해서야 산업사회 발전에 유해하다.

지나친 한의 정서는 기존사회질서를 훼손하고,무절제한 정은 그러한 훼손을 동조하고 미화한다.

우리사회가 외세에 억압된 식민지라면 정과 한은 모두 국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국민정서다.

우리가 산업사회단계를 거쳐 정보ㆍ지식사회를 지향하는 현재에도 무절제한 정과 한이 난무하고있다.

투쟁일변도의 노사분규,지역패권주의,각종 집단이기주의등 한풀이 사례가 허다하다.철저한 책임의식,합리주의 정신의 밑바탕없이 시장경제도 근대사회화도 공염불이다.

눈물을 절제하고 정을 가다듬는 한편 한을 잘 다스려야 밝은 미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