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름다운 건조물과 도시 .. 김우창 <고려대 영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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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케임브리지는 아름다운 도시다.
그곳에서도 눈에 띄는 곳이 킹스칼리지다.건물도 좋지만 넓은 잔디밭을 앞에 두고 있어 전체의 유원한 원근법이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대학의 뒤로 돌아가면 다시 잔디와 숲이 캠강을 향해 넓게 펼쳐 내려간다.
킹스칼리지에서도 유명한 것은 그 채플이다.이 건물은 중세 유럽의 고딕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례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킹스칼리지 전설의 사연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15세기 초 헨리 6세가 이 대학을 창립할 때,지금의 킹스칼리지 자리는 집들과 공방 나루터 교회 등이 어지럽게 엉클어져 있는 시골 도시였다.대학을 짓기 위해 많은 집들이 철거됐고,많은 사람들이 삶의 근거지를 잃어야 했다.
20세기 초 대학 당국은 여러 가지 건축계획을 만들어 기존 건물의 사진사이에 맞추어 보다가,원형의 아름다움을 손상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증축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회문제를 일으키며 출발한 대학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손상을 두려워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킹스칼리지는 아름다운 곳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건립할 때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이라든가,역사라든가 하는 것을 표현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간단히 말해 바른 윤리적 태도는,사르트르가 말한 바와 같이 백성의 고혈이 들어간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업적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모순과 갈등의 역사다.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것들은 다 좋은 경우라도 서로 모순과 긴장을 일으킬 때가 많다.
서울시의 시가지 계획이나 건축물들을 생각할 때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 절대적 의미에서 좋은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도시가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추하다고 하더라도 개선에 요구되는 희생 또는 비용의 상대적 의미를 생각할 때 좋은 도시를 만든다는 일에만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은 도시의 요건 이외에도 생각해야할 여러 요인들이 많다.
서울뿐만 아니라 나라 전역에 걸쳐 우리나라만큼 건축과 건설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서울은 지난 수십년간 시 전체가 큰 공사장 같았다.
우리의 영일이 없는 듯한 삶은 여기에 관계가 많다.
삶의 안정감이 손상되는 외에 많은 예각적인 문제들이 일어난다.
공간이란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건설과 건축은 다소간의 긴장과 갈등없이 진행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건설현장의 갈등에 쟁점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아름다운 기념비적 건조물이냐,서민의 생활이냐 하는 것이 대립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외없이 핵심이 되는 건 물질적 이익의 문제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동산 이익을 챙겨야겠다는 측과 거기에 대항하는 모든 것,생활 아름다움 환경과 같은 모든 인간적 가치가 대립하는 것이다.
경기도 일산에서 주민들이 러브호텔과 고층빌딩 건설에 반대해 일어난 얘기가 보도되고 있다.
현장을 조사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나,그런 건축물들이 거주지 삶의 평화와 쾌적감을 파괴하고,또 주민들이 주장하듯 교육환경을 해칠 것이라는 점은 다른 경우들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건축 동기의 하나는 아름다운 건조물을 남기려는 세도가의 욕심이었다.
킹스칼리지의 경우 서민의 삶에 대립한 것이 아름다움이었다고 하더라도,그 아름다움에는 권력의 위세가 개입돼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권세가들이 위세를 과시하는 호화주택이나 별장 또는 사옥들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도시와 국가의 아름다움의 공적 자산에 기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의 건물은 최선의 경우 기능에,나쁜 경우 사치와 과시에 도움이 될 뿐이다.
더 지배적인 동기는 단순한 돈벌이다.
그 앞에서 삶의 평화도,공동체 조성도,아름다움도,환경도 모두 희생된다.우리 사회에는 욕심과 의욕이 넘치면서도,나라나 사회나 이웃의 아름다움에 보탤만한 건조물을 남기겠다는 욕심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익이 된다''면 환경과 도시와 동네에 오래 오래 오점이 되는 건조물을 남기는 것은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곳에서도 눈에 띄는 곳이 킹스칼리지다.건물도 좋지만 넓은 잔디밭을 앞에 두고 있어 전체의 유원한 원근법이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대학의 뒤로 돌아가면 다시 잔디와 숲이 캠강을 향해 넓게 펼쳐 내려간다.
킹스칼리지에서도 유명한 것은 그 채플이다.이 건물은 중세 유럽의 고딕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례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킹스칼리지 전설의 사연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15세기 초 헨리 6세가 이 대학을 창립할 때,지금의 킹스칼리지 자리는 집들과 공방 나루터 교회 등이 어지럽게 엉클어져 있는 시골 도시였다.대학을 짓기 위해 많은 집들이 철거됐고,많은 사람들이 삶의 근거지를 잃어야 했다.
20세기 초 대학 당국은 여러 가지 건축계획을 만들어 기존 건물의 사진사이에 맞추어 보다가,원형의 아름다움을 손상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증축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회문제를 일으키며 출발한 대학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손상을 두려워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킹스칼리지는 아름다운 곳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건립할 때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이라든가,역사라든가 하는 것을 표현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간단히 말해 바른 윤리적 태도는,사르트르가 말한 바와 같이 백성의 고혈이 들어간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업적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모순과 갈등의 역사다.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것들은 다 좋은 경우라도 서로 모순과 긴장을 일으킬 때가 많다.
서울시의 시가지 계획이나 건축물들을 생각할 때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 절대적 의미에서 좋은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도시가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추하다고 하더라도 개선에 요구되는 희생 또는 비용의 상대적 의미를 생각할 때 좋은 도시를 만든다는 일에만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은 도시의 요건 이외에도 생각해야할 여러 요인들이 많다.
서울뿐만 아니라 나라 전역에 걸쳐 우리나라만큼 건축과 건설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서울은 지난 수십년간 시 전체가 큰 공사장 같았다.
우리의 영일이 없는 듯한 삶은 여기에 관계가 많다.
삶의 안정감이 손상되는 외에 많은 예각적인 문제들이 일어난다.
공간이란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건설과 건축은 다소간의 긴장과 갈등없이 진행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건설현장의 갈등에 쟁점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아름다운 기념비적 건조물이냐,서민의 생활이냐 하는 것이 대립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외없이 핵심이 되는 건 물질적 이익의 문제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동산 이익을 챙겨야겠다는 측과 거기에 대항하는 모든 것,생활 아름다움 환경과 같은 모든 인간적 가치가 대립하는 것이다.
경기도 일산에서 주민들이 러브호텔과 고층빌딩 건설에 반대해 일어난 얘기가 보도되고 있다.
현장을 조사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나,그런 건축물들이 거주지 삶의 평화와 쾌적감을 파괴하고,또 주민들이 주장하듯 교육환경을 해칠 것이라는 점은 다른 경우들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건축 동기의 하나는 아름다운 건조물을 남기려는 세도가의 욕심이었다.
킹스칼리지의 경우 서민의 삶에 대립한 것이 아름다움이었다고 하더라도,그 아름다움에는 권력의 위세가 개입돼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권세가들이 위세를 과시하는 호화주택이나 별장 또는 사옥들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도시와 국가의 아름다움의 공적 자산에 기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의 건물은 최선의 경우 기능에,나쁜 경우 사치와 과시에 도움이 될 뿐이다.
더 지배적인 동기는 단순한 돈벌이다.
그 앞에서 삶의 평화도,공동체 조성도,아름다움도,환경도 모두 희생된다.우리 사회에는 욕심과 의욕이 넘치면서도,나라나 사회나 이웃의 아름다움에 보탤만한 건조물을 남기겠다는 욕심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익이 된다''면 환경과 도시와 동네에 오래 오래 오점이 되는 건조물을 남기는 것은 마음에 거리끼는 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