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북한이 불행한 이유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덕이''라는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다.

천사같이 착하고 유능한 막내딸 덕이가 염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집안사람들을 모두 보살핀다는 이야기다.사기꾼 아버지와 깡패 오빠는 등치고 빼앗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

덕이는 한없는 가족애를 발휘해 이들이 감옥에 가면 빼내고,털어먹을 게 뻔한 사업자금을 대준다.

불구자인 둘째 오빠는 자립하겠다고 집을 나가지만 객지에 발을 디디자 마자 덕이가 마련해준 생활밑천을 모두 도둑맞는다.그는 절대로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친다.

그러나 구세주 덕이가 달려오자 마지못해 돌아와 다시 편안한 생활을 한다.

덕이 덕분에 이 가족은 고생하지 않고 편안한 삶을 보내는 행운을 누린다.그렇지만 스스로의 생활 능력을 기를 필요나 의욕을 가질 수가 없다.

심기일전해서 자립해 봤자 덕이로부터 얻는 도움에 비해 그들 자신의 땀의 대가가 보잘 것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세계의 질서는 가족의 질서와 유사하다.인민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당의 ''보살핌''을 받아서 분배받는다.

그리고 작은 국가는 중국 러시아와 같은 ''형님''나라로부터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정치적 도움을 얻어 자원을 구하는 것이다.

북한이 이제까지 국제사회에서 억지(抑止)나 정치적 거래로 이득을 얻으려는 자세를 보여온 것은 이러한 그들의 체제적 인습을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남북한 정상이 지난 6월 회동한 이래 북한은 파격적이라 할 만큼 전향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북한이 본격적인 개방과 변화의 길에 오른 증거로 보기는 어려우나,북한은 그동안 그 존립의 터전이었던 사회주의세계의 우방을 하나 하나 잃어 왔다.

언젠가는 그들의 전철(前轍)을 밟아 새 세계로 나와서 새로운 생존방식을 습득해야 함이 북한에도 운명이 될 것이다.

북한은 우수한 인적자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구 체제로부터 인습된 노동력의 자발성과 창의성 결핍이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회주의국가가 봉착하는 공통적 문제다.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 비해 시장체제에서 특별히 발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단지 이들과 달리 북한의 개방 장도(壯途)에는 남한이라는 ''존재''가 새 변수로 등장하는 것이다.

모든 개도국이 초기엔 피땀의 노력을 들이고,그 결과의 일부를 착취당하는 과정을 겪는다.

땀공장에서 혹사되고,매매과정에서 편취(騙取)되고,쥐꼬리만한 이익은 이자와 권리금으로 뜯긴다.

그러나 연전에 비교해 아주 조금 나아진 생활과 저축에 기뻐하고,이에 고무돼 더욱 노력 정진하고,그러는 동안 소득과 생산능력이 일보일보 신장하는 게 개발의 일반적 과정이다.

이것이 남한이나 최근의 체제 전환국들이 모두 겪은 과정이다.

그런데 북한은 잘사는 남한을 비교와 협력대상으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몰랐으나 잘사는 형제국의 사정을 보니 고로(苦勞)는 한이 없고 자력(自力)의 성과는 보잘 것이 없다.

남쪽과의 격차는 한이 없어서,덕이네 식구처럼 당초부터 꾸준한 노력을 기울일 의욕이 꺾인다.

남한에서 도와준다 해도 항상 섭섭하기 짝이 없고,남한과의 상거래는 모두 도둑질 당하는 기분이다.

다른 후진국은 스스로의 과거만이 비교대상이 되고,오직 자력갱생만을 믿지만 북한은 이런 행운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향후 북한이 자존과 독립의 능력을 갖춘 세계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그 자질보다 의지가 더욱 필요하게 될 건 말할 나위없다.

그런데 그간 남한의 정책은 북한의 구태를 용인하고 부채질한 감이 있다.

북한은 정치적·인도적 접촉은 물론이고 경제협력·관광·예술인 초청공연 등 모든 교류와 거래에 거액의 대가를 요구했고,우리 관·기업이 이에 응했다는 게 공공연한 소문으로 돌고 있다.

과거에 북한을 은폐된 구석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정책이 용인됐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의 대북한 정책자세는 북한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다.불행하게 남한을 이웃으로 가진 오늘의 북한을 진정으로 돕는 방법은,냉정하지만 그들 자신의 의지 이상의 약이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