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개암사'] 우뚝솟은 대웅보전 .. 百濟人 기상 '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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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렸다.
14호 태풍 사오마이가 몰고 왔던 거대한 비구름은 북동쪽으로 쫓기듯 물러갔다.저만치 흐르는 구름 사이 여기저기로 내리 비치는 햇살의 곧은 궤적이 뚜렸했다.
차창을 반쯤 내리고 페달에 발을 얹었다.
끈적였던 차 안 공기가 이내 파삭해졌다.부안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변의 너른 들녘엔 벼가 누릿누릿 무거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코스모스의 하늘거림과 잠자리의 비상이 한껏 자유로웠다.
베트남 말로 "미(美)의 여신".태풍 사오마이의 이름에 담긴 뜻이 그제서야 풀리는 듯했다.
말갛게 푸른 하늘, 시선을 둘 곳 없을 정도로 탁트인 평야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간간이 차에서 내려 그 아름다움을 들이켰다.그래, 이제부터 진짜 우리땅의 가을이다.
지난 주말 6시간을 달려 늦은 오후에 닿은 전북 부안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의 개암사(開巖寺).
능가산개암사라 쓰인 큼직한 현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들어선 경내는 아침까지 휘몰아친 비바람에 세진(世塵)이 씻긴 듯 말끔했다.
이곳에는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역사가 어려 있다.
원래는 변한의 왕궁터.
기원전 3세기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고 계곡 좌우의 전각을 개암과 묘암으로 했다고 한다.
그후 7세기초 백제 무왕때 묘련왕사가 절로 고쳐 각각 개암사와 묘암사로 불렀다는 것이다.
대웅보전(보물 292호)이 특히 두드러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9칸 규모의 대웅보전은 치밀했다.
크기가 주변 산세와 더할수 없는 완벽한 비례를 이뤘다.
그렝이수법으로 주추에 올린 기둥은 규모에 비해 우람했지만 안정감을 주었다.
팔작지붕의 추녀는 날렵하게 치솟았고 단청이 모두 씻긴 외부는 단아함을 더했다.
내부는 옛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대들보와 뜬창방에 걸처 있는 용머리상, 닫집에 꿈틀대는 용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대웅보전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지장전의 청림리석불좌상은 수수했고 응진전의 나한상은 꽤 익살스러웠다.
대웅보전을 안고 있는 뒷산 꼭대기에는 회색빛 거대한 바위 두개가 있다.
대웅보전 앞에서 보면 용마루 위에 일부러 얹어 놓은 것 같다.
울금바위다.
변한의 유민들이 왕궁건설을 맡았던 우 장군과 진 장군의 성을 따 우진암으로 불렀다던 바위다.
대웅보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30여분.
울금바위엔 원효대사가 수도처로 삼았다고 하는 원효방이란 큼직한 굴과 복신굴이 있다.
복신은 백제의 부활을 외치며 마지막 항전을 이끌었던 왕족 승려다.
백제는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쓰러졌다.
복신과 도침은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넷째아들 풍을 받들어 나.
당연합군에 맞섰다.
변한사람들이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쌓은 우금산성이 그 본거지였던 주류성이란 것이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풍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의 분열로 백제의 명맥은 두번째로 결집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끊겼다.
그때가 663년이다.
땅거미가 짙어졌다.
대웅보전 앞 경내는 한층 고즈넉해졌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개 두마리가 어슬렁거렸다.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짖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공양을 준비하던 성타스님이 웃었다.
"사나운 개도 절에 좀 있으면 순해지기 마련이지요"
내소사~직소폭포 산행을 위해 잠자리를 찾을 시간.
3백살이 되었다는 경내의 느티나무를 지날 때 대웅보전 기둥머리에 붙여 놓은 경문이 떠올랐다./벙어리 처럼 침묵하고 임금 처럼 말하며/.../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 처럼 자기를 낮추어라/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풀릴 때를 근심하라/.../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14호 태풍 사오마이가 몰고 왔던 거대한 비구름은 북동쪽으로 쫓기듯 물러갔다.저만치 흐르는 구름 사이 여기저기로 내리 비치는 햇살의 곧은 궤적이 뚜렸했다.
차창을 반쯤 내리고 페달에 발을 얹었다.
끈적였던 차 안 공기가 이내 파삭해졌다.부안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변의 너른 들녘엔 벼가 누릿누릿 무거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코스모스의 하늘거림과 잠자리의 비상이 한껏 자유로웠다.
베트남 말로 "미(美)의 여신".태풍 사오마이의 이름에 담긴 뜻이 그제서야 풀리는 듯했다.
말갛게 푸른 하늘, 시선을 둘 곳 없을 정도로 탁트인 평야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간간이 차에서 내려 그 아름다움을 들이켰다.그래, 이제부터 진짜 우리땅의 가을이다.
지난 주말 6시간을 달려 늦은 오후에 닿은 전북 부안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의 개암사(開巖寺).
능가산개암사라 쓰인 큼직한 현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들어선 경내는 아침까지 휘몰아친 비바람에 세진(世塵)이 씻긴 듯 말끔했다.
이곳에는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역사가 어려 있다.
원래는 변한의 왕궁터.
기원전 3세기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고 계곡 좌우의 전각을 개암과 묘암으로 했다고 한다.
그후 7세기초 백제 무왕때 묘련왕사가 절로 고쳐 각각 개암사와 묘암사로 불렀다는 것이다.
대웅보전(보물 292호)이 특히 두드러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9칸 규모의 대웅보전은 치밀했다.
크기가 주변 산세와 더할수 없는 완벽한 비례를 이뤘다.
그렝이수법으로 주추에 올린 기둥은 규모에 비해 우람했지만 안정감을 주었다.
팔작지붕의 추녀는 날렵하게 치솟았고 단청이 모두 씻긴 외부는 단아함을 더했다.
내부는 옛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대들보와 뜬창방에 걸처 있는 용머리상, 닫집에 꿈틀대는 용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대웅보전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지장전의 청림리석불좌상은 수수했고 응진전의 나한상은 꽤 익살스러웠다.
대웅보전을 안고 있는 뒷산 꼭대기에는 회색빛 거대한 바위 두개가 있다.
대웅보전 앞에서 보면 용마루 위에 일부러 얹어 놓은 것 같다.
울금바위다.
변한의 유민들이 왕궁건설을 맡았던 우 장군과 진 장군의 성을 따 우진암으로 불렀다던 바위다.
대웅보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30여분.
울금바위엔 원효대사가 수도처로 삼았다고 하는 원효방이란 큼직한 굴과 복신굴이 있다.
복신은 백제의 부활을 외치며 마지막 항전을 이끌었던 왕족 승려다.
백제는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쓰러졌다.
복신과 도침은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넷째아들 풍을 받들어 나.
당연합군에 맞섰다.
변한사람들이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쌓은 우금산성이 그 본거지였던 주류성이란 것이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풍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의 분열로 백제의 명맥은 두번째로 결집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끊겼다.
그때가 663년이다.
땅거미가 짙어졌다.
대웅보전 앞 경내는 한층 고즈넉해졌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개 두마리가 어슬렁거렸다.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짖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공양을 준비하던 성타스님이 웃었다.
"사나운 개도 절에 좀 있으면 순해지기 마련이지요"
내소사~직소폭포 산행을 위해 잠자리를 찾을 시간.
3백살이 되었다는 경내의 느티나무를 지날 때 대웅보전 기둥머리에 붙여 놓은 경문이 떠올랐다./벙어리 처럼 침묵하고 임금 처럼 말하며/.../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 처럼 자기를 낮추어라/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풀릴 때를 근심하라/.../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