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 칼럼] 전문직 종사자의 수난시대

학교에서 이제 막 응급처치법을 배운 어느 고등학생이 하교길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데를 지나게 됐다.

비집고 들어가보니 뇌빈혈인가로 한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웬 여자가 그 옆에 앉아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이 학생은 배운 걸 써먹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저리 비키세요!"하고 여자를 밀쳐내고 달려들었다.

첫째 환자의 머리부분을 낮추고, 둘째 단추를 풀어주며 의복을 느슨하게 해주고….

배운대로 외워가며 해나가는데 아까 밀려났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학생, 다섯번째쯤에서 의사를 불러야 한다는 항목이 나오거든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의사니까"

이 농담속의 여의사처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를 포함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수난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의약분업 문제로 의료계의 폐·파업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의사들은 금전적인 손실과 함께 시민단체 및 여론의 지탄과 눈총에 시달리고 있다.의사와 함께 한때 잘나간다던 직종인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두어달 전에는 사건 알선을 대가로 브로커들 한테 수천만원의 금품을 제공했던 수임비리 변호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됐고 검찰은 그중에서 52명을 기소한 바 있다.

사기혐의로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어느 변호사가 대법원의 실형 확정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 미국으로 도피한 일도 발생했다.어느 것이나 다 전체변호사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우계열사의 회계장부 조작 사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 회계법인이 중징계를 받았고 관련 회계사 11명이 고발 또는 수사 통보됐다.

또한 이들을 포함한 22명의 회계사가 등록취소 또는 직무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우계열사 소액주주들이 회계법인들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준비중이라 한다.

또 하나의 전문직인 펀드매니저들도 적지 않은 고난을 겪고 있다.

주식값이 곤두박질치다 보니 펀드들의 수익률이 대부분 마이너스 상태를 면치 못해 이들의 자질과 능력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확산돼가고 있다.

전문직들의 신용과 명예가 실추된 데는 물론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새롭고 분명한 직업윤리를 갖추지 못한 채 과거의 관행을 고집하고 존경과 부를 동시에 계속 누리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점은 전문직들 스스로도 맹성하고 고쳐나가야 할 것이며 정부쪽에서도 엄격한 기준을 세워 집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정부와 국민들이 반성해 봐야 할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전문가나 전문직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우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건이나 환경이 그렇지 않은데도 이상론만 앞세워 이들을 몰아붙이거나, 그 가치를 무시하거나, 이들의 소득이 다소 높다고 해서 괜히 배아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는 인사때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중요한 자리에 그 분야의 아마추어를 앉히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장관이나 대사들의 자질이 수시로 문제가 됐고 개각 등 후속인사이동도 빈번해 졌다.

최근에는 국영기업체에 여당 공천 탈락자나 낙선자들을 들여보냈다고 해서 야당 사무총장이 ''인간쓰레기들 집합소''라고 부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랏돈으로 세운 전문연구기관들의 연구결과도 무시하거나 홀대하다보니 연구원 박사들의 반발이 드세어지고 있다.

의약분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자의 입을 막다시피 했고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만을 강조하면서 자존심을 건드리다 보니 의료분쟁이 이처럼 악화된 감이 없지 않다.

전문가들이나 전문직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대우해주지 않고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일이다.이사람들이 역량을 축적하고 또 발휘해 줘야 양질의 서비스가 가능해 지고 국민들의 삶의 질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여론도 매를 들 때는 들어야 하겠지만 경제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전문가들의 전문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만큼은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