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195) 제2부 : IMF시대 <5> 증오심(3)

글 : 홍상화

지난 2개월 동안 백인홍은 대해그룹 소속 독립법인인 대해직물의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 경영권 이전과 관련해서 노조와 협상을 벌여왔으나,쉽게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노조에서 내건 조건이 단순히 고용조건 승계 범위를 뛰어넘은 무리한 요구를 포함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노사간에 조금씩 양보하면 얼마쯤 힘의 시위 과정을 거쳐야겠지만,시간이 지나면 합의점을 찾지 못할 리가 없다고 백인홍은 확신했다.

하지만 노조에서 자신을 향해 악의적인 명예훼손의 범주에 속하는 총파업을 벌인 것은 백인홍으로서는 전혀 뜻밖이었다.그런 총파업은 단순히 근로자의 대우개선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일면 그것은 노사간의 타협이 목적이 아닌 극한 투쟁으로 몰고 가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만큼 악랄한 것이었다.

이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끝맺은 백인홍은 분은 못 참아 가쁜 숨을 내쉬며 유인물 두 장을 주머니에서 꺼냈다.유인물 한 장을 권혁배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유인물이야?"

"노조가 공장 게시판에 붙인 유인물이야""지금 노조와는 어떤 상태야?"

"지난주부터 총파업에 들어갔어"

"최형식이 도움이 안 돼?"

"노력하고 있지만 노조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 어쩔 수 없었나봐"

권혁배가 유인물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대해직물을 인수한 백운직물의 사주인 백인홍의 부친은 악명 높은 백선호임이 밝혀졌습니다.

백선호는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조선 여인들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를 상대로 유곽을 경영한 극렬한 친일파입니다.

그때 만주에 있던 유곽에서 강제로 일했던 조선 여인들은 백인홍의 부친인 백선호가 취직을 미끼로 데려간 여염집 소녀들이었음도 밝혀졌습니다.

백선호는 유곽경영으로 쌓은 막대한 재산을 해방 후 국내로 가져와 백운직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외아들 백인홍에게 회사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백인홍…''

"이것이 사실이야?"

권혁배가 유인물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대부분 사실인 것 같아.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야.아버지가 만주에 데려간 조선 여인은 여염집 여인들이 아니고 직업여성들이었대.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이 유인물을 읽어봐"

백인홍이 가지고 있던 다른 유인물을 내밀었다.

권혁배가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백인홍은 과거 미성년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는 자로서 도덕관이 극도로 문란한 파렴치한 자입니다.

…백인홍을 경영자 및 기업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나이 어린 여성 근로자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를 경영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야?"

권혁배가 유인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고등학교 시절 어느 여학생과 관계를 가진 일이 있었어.강제가 아니었는데 그 여학생 어머니가 나를 강간혐의로 고발하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된 거지.바로 그 얘기야"

백인홍이 어이없어 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