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이응노 미술관

고암 이응노(1904∼1989) 선생은 충남 홍성군 중계리에서 태어났다.

해강 김규진 선생 문하에 들어간지 한해만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晴竹)''으로 입선했다.33년 사학자 정병조 선생에게 ''고암''이란 호를 받았고 35년 도일, 전통회화와 서양화의 접목을 시도했다.

광복 후 이를 바탕으로 전통산수화나 인물 문인화 사군자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현한 독특한 수묵추상화를 내놓았다.

우리 나이로 쉰다섯이던 58년 프랑스로 건너가 ''문자추상''이라는 제목의 비구상화와 콜라주를 시작했다.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음에도 돌아간 뒤 오히려 판화 태피스트리 조각 벽화 등 다양한 작업을 시도했다.

77년 또다시 윤정희ㆍ백건우 사건으로 귀국은 물론 국내에서의 작품매매까지 금지됐지만 쉬지 않고 활동, 82년부터 ''군상'' 연작을 본격화했다.

자신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며 다만 우리민족은 통일돼야 살 길이 있는 만큼 통일을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발벗고 나설 용의가 있다"고 털어놓았지만 이런 생각이 받아들여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결국 고향에 다시 오지 못한채 89년 1월 10일 서울 호암갤러리의 개인전 개막식 날 파리에서 타계했다.

고암은 그저 타고난 화가였다.

옥중에서 화장실 휴지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도시락 조각을 쪼개 밥풀로 붙인 다음 간장 된장으로 물을 들여 작품을 만든건 유명하다.''재료가 없어 못그린다는건 거짓말이다, 작품이란 부서지고 찢어져 한쪽만 남아도 그 한조각이 전체를 말할수 있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고암의 예술세계를 보여줄 이응노미술관이 14일 문을 연다.

격변의 세월을 살면서도 순치되지 않았던 예술가의 흔적을 찬찬히 살펴볼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진정한 예술가는 사회적 제약은 물론 자신이 구축한 양식이나 신화조차도 과감히 깨뜨린다''고 하거니와 고암의 폭넓은 작품세계는 어떤 역경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놀라운 창작열과 실험정신을 보여줄 것이다.

미술작품에 문학적 포장을 일삼거나 너무 일찍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