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급등' 산업계 파장] (中) '기업들 헤지 기피'..위험 자초

"외환위기로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요"

모 외국계은행 딜링룸의 K매니저는 이 한마디로 국내기업들의 주먹구구식 외환관리를 질타했다.국내 기업들은 금리 동향에는 엄청난 신경을 쓰면서도 금리보다 변동폭이 훨씬 큰 환율에는 지나치게 둔감한 편이다.

"환율은 당연히 정부가 잡아주겠지"(S그룹 관계자)라는 안이한 인식이 기업들의 방만한 외환리스크 관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환율이 급등락할 경우 기업들의 채산성 관리는 엉망으로 꼬여들기 일쑤다.이번에 환율급등을 주도한 정유사들의 경우 여전히 갈피를 잡지못하고 현금확보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실 환율이 계속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면 정유사처럼 외상수입을 늘리는 게 맞다.

올 상반기만 해도 원화가치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던 만큼 현금결제를 미룬 정유사들의 판단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시적인 판단 착오로 손실을 봤으면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정유사를 포함한 상당수 기업들은 요즘 달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향후 2∼3개월내 갚아야 할 결제물량까지 무차별적으로 사들이고 있다.만약 치밀한 계산과 관리전략을 갖고 있다면 정유사들의 환관리 방법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우선 환율이 추가상승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면 당장 현물환을 사기보다 차라리 외화차입을 하는게 낫다.

지금 미리 확보해놓은 달러의 가치가 2∼3개월내 하락하면 손실을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환율이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선물환 매입을 통한 헤지(리스크 제거)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도 무조건 현물환을 ''선취매''하는 행태는 어설픈 개인투자자들의 주식투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삼성 LG SK그룹등은 그룹이나 개별기업 차원에서 ''사내선물환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해진지 오래다.

동일한 그룹내 계열사들이 같은 날 반대방향의 매매를 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헤지에 대한 경영진의 이해부족도 문제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업체들의 경우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97년말 선물환을 대규모로 팔았다가 몇달후 막대한 기회손실을 입은 적이 있다.

모회사의 경우 3억달러의 매도헤지를 걸었다가 환율이 2천원 가까이 치솟으면서 무려 2천억원 이상의 기회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외화자금팀은 강도높은 문책을 받게 돼 그 뒤론 한번도 선물환거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기업내 어느 누구도 외환관리와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결국 최고경영자가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타이밍을 놓치거나 방향이 틀어집니다.(H그룹 관계자)

전문인력들도 절대 부족한 상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아직도 원화관리팀에 외환관리 인력을 곁다리로 붙여놓고 있다.

외환딜러들은 지난 7월 이후 역외선물환시장(NDF)에서 꾸준히 선물환을 사모았던 외국인들이 요즘 선물환 매도로 돌아선데 주목해야한다고 지적했다.시장의 추세가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도 추세에 역행하는 거래를 일삼는 기업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