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격변 '유통산업'] (기고) 소비자 구매대행자 역할을

황의록

90년대에 들어 국내 유통산업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특히 96년 유통시장 개방 이후 수많은 중소 유통업체들이 도산을 했을 뿐 아니라 외형 불리기에 주력했던 일부 업체 역시 외환위기를 맞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서 국내 유통시장은 자본력을 앞세운 국내외 대기업들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유통산업의 변화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 유통산업을 주도하는 백화점과 할인점 분야에서는 외형 경쟁이 계속되고 있고,과점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른바 "빅4"간의 끝없는 선두다툼과 이에 도전하는 국내외 중견업체들의 도전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어 결말이 어떻게 맺어질지는 속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유통업계에 또 한번의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 명백할 따름이다. 유통업계의 빅뱅을 예고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전자상거래의 등장이다.

케이블TV 홈쇼핑시장의 급성장과 인터넷 쇼핑몰 등 전자상거래는 가까운 장래에 기존 유통구조를 흔드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TV 홈쇼핑 및 인터넷 쇼핑몰의 이용자와 매출이 급증하고 있는데다 B2B 시장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그 충격은 더욱 커질 것이다. 유통업계에 나타나고 있는 다른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두타,밀리오레,테크노마트 같은 엔터테인먼트형 쇼핑몰의 급속한 확산이다.

젊은층을 대상으로 중저가의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면서 쇼핑과 함께 휴식과 여흥을 제공하는 오락,문화,쇼핑의 결합체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어서 재래시장 근대화의 활로가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이와함께 소비자의 인식과 행동 변화 또한 중요한 요소로 지적된다.

이른바 "브랜드 로열티 시대"에서 "스토어 로열티 시대"로 변하고 있다.

유통업체들이 대형화,다점포화되면서 자체 마케팅 능력(시장조사,소비자조사,제품개발)이 향상되고 고객들의 신뢰가 높아지면서 마켓파워가 급격히 유통업체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높아진 가격 민감도가 유통업체의 위상 변화와 맞물리면서 유통업체마다 PB상품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소비자들의 구매장소 역시 구매상품에 따라 특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상류층은 백화점,서민층은 재래시장 하는 식이거나 한 점포에서 모든 것을 구매하려는 성향을 보였으나 이제는 같은 소비자라도 옷을 살 때는 백화점에 가고,가끔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하지만 생활수준에 관계없이 생필품은 할인점에 가서 한푼이라도 싸게 사려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러한 유통환경의 변화는 유통업체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요즘 누구나 하는 이야기지만 유통업체도 이제 실속없는 외형추구보다는 내실(이익)위주로 하루 빨리 전환해야 한다.

미국 유통업체들의 평균 수익률이 15~20%인데 비해 국내 유통업체들의 평균 수익률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수익성을 무시한 부질없는 외형경쟁의 끝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선진유통기법과 금융비용 부담이 없이 거의 무한자본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선진유통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한국소비자들을 분석하며 과열경쟁으로 토종업체들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요에 부응하는 마케팅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조하는 마케팅으로 전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유통업체의 성공은 저원가 저가격이 전부가 아니다.

고객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매출과 이익을 키울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유통업체는 이제 제조업체를 위한 판매대행업체가 아니라 소비자들을 위한 구매대행업체가 되어야 한다.

구매대행업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먼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소비자들의 문제와 욕구를 정확히 읽어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제안판매가 바로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국내유통업체들은 이제 그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할 때가 됐다.

바꿔 말하면 각 업체의 전략적 초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 유통업체들을 나름대로 업태를 내세워 왔으나 사실상 특색이 없었다.

백화점은 할인점을 모방하고 할인점은 백화점을 흉내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업태들,모든 업체들이 혼전을 펼치고 있다. 이제는 표적 고객층을 분명히 하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백화점은 백화점다워야 하고 할인점은 할인점다워야 승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