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기자의 '책마을 편지'] 눈 오는 날의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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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는 중에 눈이 내렸습니다.
며칠 전 잠깐 비치다 만 홑눈에 비하면 제법 입자가 큰 싸락눈입니다.눈 오는 날에는 누구나 마음이 맑아지지요.
단지 눈이 온다는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걸고,그리운 사람을 마중하듯 들길로 나서기도 합니다.
비오는 날의 감성이 조금 우울하고 외로운 톤이라면 눈오는 날의 마음빛은 명랑하고 다정스러운 색채를 띱니다.그 하얀 색감이 우리네 일상의 밑그림을 깨끗하게 칠해주지요.
겨울에는 하얀 표지의 책이 잘 팔린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감성의 촉수가 흰 눈의 이미지와 맞닿은 결과지요.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피천득 선생의 ''인연''은 별다른 기교 없이 그냥 흰 표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무 옷도 입지 않은 순수의 눈밭.
그 무채색의 질량감은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시각적인 면에서 보면 흰색은 차갑습니다.
그러나 순백의 도화지처럼 무엇이든 그릴 수가 있고,여백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의미를 갖습니다.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도 있고 백지의 매끈한 질감을 손으로 느낄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공감각적인 삶의 매개가 아닐까요.
남해 금산 산장에서 겨울 며칠을 지낼 때였습니다.
밤새 내린 눈 위로 산꿩이 총총총 발자국을 찍으며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지요.
백야 속에서 길을 만들고 그 길 위로 지나간 생의 부분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이 위에서 스스로 활자가 되고 책갈피가 되어 자신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얼마 전 영화 ''필로우북''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몸에 글자를 새기고,우편물처럼 그를 보내서 신체 구석구석에 감춰진 소문자까지 읽게 하는 장면.
그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소포책,아니면 ''걸어다니는 책''이라고도 부를 만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정해진 여백 위에 삶의 잉크를 한 방울씩 찍어나가는 것이겠지요.
흰 책이나 눈밭의 발자국,몸에 새긴 글자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비어 있음''의 뜻을 다시 새겨봅니다.
모두들 살기 힘들다고,가슴 한 쪽이 텅 빈 것 같다고 허탈해 합니다.
이럴 때는 스스로 자신을 채우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어려울 때 위안이 되는 힘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까.
오늘같은 날은 눈밭에 혼자 서 있을 때처럼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보게 됩니다.
남이 쓴 책을 읽기만 하다가 직접 글을 한번 써보는 것.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어찌 보면 삶의 뒷면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만큼 커다란 전환이기도 합니다.
곧 눈이 그치면 세상은 또 별스럽지 않게 잘 돌아갈 것입니다.다만 눈이 내리고 그치는 동안 우리 내면의 풍경이 바뀌고 그 눈밭에 오래 기억될 글자들을 하나씩 채워나간다면 이 다음 눈 오는 날쯤에는 삶도 그만큼 달라지지 않을까요.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며칠 전 잠깐 비치다 만 홑눈에 비하면 제법 입자가 큰 싸락눈입니다.눈 오는 날에는 누구나 마음이 맑아지지요.
단지 눈이 온다는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걸고,그리운 사람을 마중하듯 들길로 나서기도 합니다.
비오는 날의 감성이 조금 우울하고 외로운 톤이라면 눈오는 날의 마음빛은 명랑하고 다정스러운 색채를 띱니다.그 하얀 색감이 우리네 일상의 밑그림을 깨끗하게 칠해주지요.
겨울에는 하얀 표지의 책이 잘 팔린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감성의 촉수가 흰 눈의 이미지와 맞닿은 결과지요.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피천득 선생의 ''인연''은 별다른 기교 없이 그냥 흰 표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무 옷도 입지 않은 순수의 눈밭.
그 무채색의 질량감은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시각적인 면에서 보면 흰색은 차갑습니다.
그러나 순백의 도화지처럼 무엇이든 그릴 수가 있고,여백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의미를 갖습니다.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도 있고 백지의 매끈한 질감을 손으로 느낄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공감각적인 삶의 매개가 아닐까요.
남해 금산 산장에서 겨울 며칠을 지낼 때였습니다.
밤새 내린 눈 위로 산꿩이 총총총 발자국을 찍으며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지요.
백야 속에서 길을 만들고 그 길 위로 지나간 생의 부분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이 위에서 스스로 활자가 되고 책갈피가 되어 자신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얼마 전 영화 ''필로우북''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몸에 글자를 새기고,우편물처럼 그를 보내서 신체 구석구석에 감춰진 소문자까지 읽게 하는 장면.
그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소포책,아니면 ''걸어다니는 책''이라고도 부를 만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정해진 여백 위에 삶의 잉크를 한 방울씩 찍어나가는 것이겠지요.
흰 책이나 눈밭의 발자국,몸에 새긴 글자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비어 있음''의 뜻을 다시 새겨봅니다.
모두들 살기 힘들다고,가슴 한 쪽이 텅 빈 것 같다고 허탈해 합니다.
이럴 때는 스스로 자신을 채우는 일이 중요하겠지요.
어려울 때 위안이 되는 힘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까.
오늘같은 날은 눈밭에 혼자 서 있을 때처럼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비춰보게 됩니다.
남이 쓴 책을 읽기만 하다가 직접 글을 한번 써보는 것.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어찌 보면 삶의 뒷면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만큼 커다란 전환이기도 합니다.
곧 눈이 그치면 세상은 또 별스럽지 않게 잘 돌아갈 것입니다.다만 눈이 내리고 그치는 동안 우리 내면의 풍경이 바뀌고 그 눈밭에 오래 기억될 글자들을 하나씩 채워나간다면 이 다음 눈 오는 날쯤에는 삶도 그만큼 달라지지 않을까요.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