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春기획(6)-벤처리더] 기술승부 : 이완근 <신성이엔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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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전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이완근(60) 신성이엔지 회장.그의 뜻과는 달리 반도체장비업체의 최고경영자가 된 이 회장이 평생 꿈을 이루게됐다.
선생님은 아니지만 이달 중순 모교인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이 됐기 때문이다. 동창들의 추천이었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임을 다짐했다.
신성이엔지의 매출은 지난해 1천1백17억원.2005년엔 4천6백억원이 목표인 중견기업의 회장이지만 그가 어릴 때 집안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경기도 부천군(현 시흥시) 소래면 구석의 외진 곳이 고향이다. 전기가 들어간 지도 15년밖에 안될 정도다.
대학에 들어갈 돈이 없어 서울 원효로에 있는 한국인쇄에서 1년반동안 인쇄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교사가 되고 싶어 성균관대 교육학과에 들어갔다. 춘원 이광수,함석헌씨의 글은 모조리 읽었다.
교육자를 꿈꾸며.대학을 마치고 월남전에 참전했다.
군을 마친 후 선생님이 되기위해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에게 면접을 봤다. 그러나 서울 선생님을 싫어한다는 학교 분위기 탓에 교사의 뜻을 세우지 못했다.
취직이 어려웠던 그는 카페트 커텐 책을 파는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가 에어컨을 파는 세기냉동(현 센츄리)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탁월한 장사꾼 기질을 발휘했다.
1년만에 20대를 팔았다.
그전까지 세기냉동의 1년 판매실적은 10대였다.
이 회장은 "내가 파는데 소질이 있는 모양입니다"며 그 시절을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과장으로 그만둔 그는 잠시 자영업을 하다가 77년 신성엔지니어링을 세워 본격적인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종로2가 관철동에서 냉동기 공조기기를 수리하거나 조립 생산해 파는 일을 시작했다.
점차 품목을 항온항습기등으로 넓혀 나갔다.
80년대 초반 어느날.반도체 사업참여를 결정한 삼성전자가 클린룸설비를 개발해 달라는 중요한 제의를 했다.
단 공장건설 스케쥴을 감안해 1년만에 납품해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 회장은 회사를 도약시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실패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다.
입방피트당 먼지를 10개 이하로 유지해야 하는 첨단기술이 필요했다.
그는 기술제휴로 해결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게 착오였다.
누구도 기술제휴에 응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바로 "트로이 목마"였다.
나중에 이말은 이 회장과 함께 항상 붙어다니는 수식어가 됐다.
삼성전자가 클린룸 장비를 수입할 때 회사 직원을 끼워 보내는 것이었다.
일본 클린룸 장비업체 침투작전은 대성공.이 회장은 반월공장에 야전침대를 들여다 놓고 퇴근도 하지 않은채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결국 삼성전자로부터 제의를 받은지 1년만에 납품을 시작했다.
벤처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이뤄낸 것이다.
이 회장은 "경영이란 얼마나 종업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응집력을 발휘하는가에 달려있다"며 "기술과 경쟁력이 여기서 나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031)491-8613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
선생님은 아니지만 이달 중순 모교인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이 됐기 때문이다. 동창들의 추천이었지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임을 다짐했다.
신성이엔지의 매출은 지난해 1천1백17억원.2005년엔 4천6백억원이 목표인 중견기업의 회장이지만 그가 어릴 때 집안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경기도 부천군(현 시흥시) 소래면 구석의 외진 곳이 고향이다. 전기가 들어간 지도 15년밖에 안될 정도다.
대학에 들어갈 돈이 없어 서울 원효로에 있는 한국인쇄에서 1년반동안 인쇄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교사가 되고 싶어 성균관대 교육학과에 들어갔다. 춘원 이광수,함석헌씨의 글은 모조리 읽었다.
교육자를 꿈꾸며.대학을 마치고 월남전에 참전했다.
군을 마친 후 선생님이 되기위해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에게 면접을 봤다. 그러나 서울 선생님을 싫어한다는 학교 분위기 탓에 교사의 뜻을 세우지 못했다.
취직이 어려웠던 그는 카페트 커텐 책을 파는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가 에어컨을 파는 세기냉동(현 센츄리)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탁월한 장사꾼 기질을 발휘했다.
1년만에 20대를 팔았다.
그전까지 세기냉동의 1년 판매실적은 10대였다.
이 회장은 "내가 파는데 소질이 있는 모양입니다"며 그 시절을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과장으로 그만둔 그는 잠시 자영업을 하다가 77년 신성엔지니어링을 세워 본격적인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종로2가 관철동에서 냉동기 공조기기를 수리하거나 조립 생산해 파는 일을 시작했다.
점차 품목을 항온항습기등으로 넓혀 나갔다.
80년대 초반 어느날.반도체 사업참여를 결정한 삼성전자가 클린룸설비를 개발해 달라는 중요한 제의를 했다.
단 공장건설 스케쥴을 감안해 1년만에 납품해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 회장은 회사를 도약시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실패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다.
입방피트당 먼지를 10개 이하로 유지해야 하는 첨단기술이 필요했다.
그는 기술제휴로 해결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게 착오였다.
누구도 기술제휴에 응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바로 "트로이 목마"였다.
나중에 이말은 이 회장과 함께 항상 붙어다니는 수식어가 됐다.
삼성전자가 클린룸 장비를 수입할 때 회사 직원을 끼워 보내는 것이었다.
일본 클린룸 장비업체 침투작전은 대성공.이 회장은 반월공장에 야전침대를 들여다 놓고 퇴근도 하지 않은채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결국 삼성전자로부터 제의를 받은지 1년만에 납품을 시작했다.
벤처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이뤄낸 것이다.
이 회장은 "경영이란 얼마나 종업원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응집력을 발휘하는가에 달려있다"며 "기술과 경쟁력이 여기서 나온다"고 힘주어 말했다. (031)491-8613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