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은행돈'] '시중돈 기업 등 생산적인 부분으로 왜 안도나'

"은행 금고에 돈은 쌓이는데 굴릴 곳이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단기 상품에만 운용하면 은행이 제 역할을 안한다고 비난받을 것이고….속 모르는 예금고객은 금리가 낮다며 아우성입니다"

한 시중은행장은 최근 은행 경영의 어려움을 이렇게 호소했다.실제로 은행들은 요즘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여 있다.

부실기업 여신처리 등 구조조정 압력이 상존하고 있는 와중에 정상적인 여.수신 업무마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신용 리스크를 금리 차이로 상쇄시키면서 적극적으로 기업 대출에 나서 시중의 돈을 생산적인 부문으로 선순환시켜야 한다"고 주문한다.그러나 은행들은 "기존의 부실여신 해소도 여의치 않은데 어느 은행이 기업 대출을 늘리겠느냐"며 "구조조정이 마무리돼 경제 전체의 체력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행들만 채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 돈 굴릴데 없다 =요즘 은행들의 최대 고민은 ''돈을 어디에 굴릴 것인가''다.

경기 침체로 기업의 자금 수요 자체가 줄어든 데다 그나마 믿고 돈 빌려줄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경기가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업 대출을 늘리기는 어렵다는게 은행들의 입장.

그렇다고 채권 투자도 쉽지 않다.

국고채 등 채권금리가 지난 2,3월에 비해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자칫 채권금리가 출렁거렸다가는 수익은 커녕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주식 투자도 마찬가지다.

조흥은행 등은 아예 주식 투자를 포기한지 오래다.

때문에 은행들은 갈 길을 몰라 은행 금고로만 모이는 돈들을 운용하는데 골치를 앓고 있다.

올들어 한때 기업대출 대신 주택자금 등 가계대출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규모 면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신한은행 등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최근 인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금사정 호조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신용 리스크가 높아 우량 거래처 발굴에 어려움이 많다"며 "그래서 여유자금은 주로 채권과 콜론 환매채(RP) 등 단기자금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단기자금만 몰린다 =은행에 몰리는 돈의 성격도 문제다.

이달들어 은행 예금으로만 5조7천억원 가량이 늘었지만 이중 80%는 단기성 자금이다.

상황에 따라선 주식시장이나 채권형 펀드 등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돈이다.

마음 놓고 장기대출 등으로 운용할 수 없는 자금이란 얘기다.

자칫하면 수신과 여신간 기간 불일치가 생길 수도 있다.

올들어 예금구조는 단기화되고 있는데 비해 은행들이 장기성 주택담보대출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그런 문제가 실제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은행은 장기성 예금 확보 등 리스크 관리에 나섰다.

최근 하나은행 등이 1억원 이상 고액의 1년만기 정기예금에 대해서만 점포장 전결금리를 인상했던 것도 장기성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에서 일시에 단기자금이 빠져나가 유동성 위기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도 "그러나 예금과 대출간 기간구조 불균형이 심해지는건 문제"라고 말했다.

◇ 금리인상 딜레마 =은행들은 예금금리 인상 여부를 놓고도 고심중이다.

물가를 감안한 실질 예금금리가 마이너스가 되자 일부 고객들은 이탈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거액을 예치하는 기관들의 ''뭉칫돈''이 들썩거려 은행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예금금리를 과감히 올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예금을 적정한 수익률로 굴릴 곳도 없는 데다 예대금리차(예금금리와 대출금리 차이)도 여전히 크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은행이 1년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0.2%포인트 올리려다가 고민 끝에 당분간 보류한 것도 그런 이유다.국민은행 관계자는 "국고채 등 시장실세 금리가 어느 정도 올라간 상태에서 안정된다면 예금금리 인상을 검토할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며 "다른 은행들 눈치만 보고 있는 형편"이라고 설명했다.

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