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반도체시장의 음모

한국경제와 관련,워싱턴의 최대관심사는 역시 하이닉스반도체(구 현대전자) 문제다.

한국에서 온 인사들이 연설을 한다고 해서 가보면 미국 청중 중 누군가는 꼭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질문을 한다.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한국 주총장에서나 보던 총회꾼들을 만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없지 않다.

지난 3월 워싱턴을 다녀간 황두연 외교통상본부장이 귀아프게 들은 얘기도 결국은 하이닉스반도체 문제였다.그가 만난 로버트 죌릭 미 통상대표부 대표,앨런 라슨 국무부 경제차관,필립 크레인 하원 세입위 통상소위 위원장, 그리고 칼 르빈 상원자동차 코커스 공동의장 등 모두가 하나같이 하이닉스반도체를 최대의 관심거리로 거론한 것이다.

우드로 윌슨상을 받기 위해 워싱턴에 들러 ''한국경제 개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소개했던 이헌재 전재경부장관도 하이닉스반도체에 관해 묻는 청중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미통상 현안으로 미국인들이 거론할만한 ''1급 예상문제(?)''는 자동차일 수밖에 없다.매년 근 50만대를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이 수입해 가는 자동차 대수는 1만대도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국은 자동차를 밀어놓고 반도체를 중심의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요즘 미국은 러시아 중국 일본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콧대가 높다.

그런 미국이 관료는 물론 의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 그것도 한 반도체업체에 불과한 하이닉스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여차하면 시비를 걸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반도체 특히 D램 시장이 한국의 삼성, 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에 의해 3균분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빅3중" 누군가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면 나머지 둘은 쾌재를 부를 것이 틀림없다.

그날로 반도체는 부르는 게 값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국 대만에서 일어난 지진이 반도체 값에 영향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쉬운 유추다.

반도체 시장은 피 말리는 격전지중 격전지다.

눈치 빠른 일본인들은 그래서 아예 시장에서 빠져 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제 반도체에서 빠지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경제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마이크론이 한국 반도체업체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미국정부와 의회를 찾아다니며 로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1998년 미국 의회는 국제통화기금(IMF)에 1백80억달러를 출자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이 자금이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섬유 조선에 공급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조건을 삽입한 적이 있다.

이때도 그 뒤에는 마이크론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시아 경제위기 후에 취해진 미국의 IMF에 대한 이 추가출자 당시 똑같은 위기를 맞고 있던 러시아나 인도네시아는 거론하지 않은 채 유독 한국만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시장경제원칙을 지키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을 위하는 동정심에서 그런 충고를 하는 것이라면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국제시장은 그런 순진한 우정(?)이 앞서는 세상은 결코 아니다.

매사 뒤에서 주무르고는 딴청하는 "수렴청정식 시장경제"를 추구해 온 한국정부로서도 할 말은 없게 돼 있다. 그렇다고 일단 정해진 방침을 "미국 사람들이 떠드니 할 수 없다"며 꽁무니를 빼는 한국정부의 모습은 더욱 보기 민망하다.

양봉진 워싱턴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