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한 장관의 '흰 코끼리'

옛날 옛적 한 태국 왕이 신성(神聖)한 영물(靈物)로 간주되는 '흰 코끼리(white elephant)'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태국 왕은 흰 코끼리가 결코 선물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흰 코끼리가 태국 궁중 서열상 자신보다 더 높은 지존(至尊)의 '신성 코끼리'로 모셔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죽일 수도 쫓아 낼 수도 없는 코끼리는 왕의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영어 단어 white elephant는 아예 '골칫거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한승수 외교통상부장관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북·미대화 재개'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이를 부시가 한 장관에게 내린 큰 선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부시의 '대북(對北) 대화재개' 선언이야말로 '흰 코끼리' 선물 그것이었다. 대북협상을 하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은 협상의제를 미사일문제 등 사안별로 단순화시켰다. "한 건 한 건(one at a time) 풀어가자"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의제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것이라도 제대로 풀고 나면 그 다음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시는 '미사일문제'에 '94년 제네바 합의보완문제'를 첨가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재래식무기'라는 더 풀기 어려운 난제까지 '함께(comprehensive)' 코끼리 등에 얹어 한 장관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북한이 이 흰 코끼리를 어떻게 요리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흰 코끼리가 북한과 남한, 심지어 미국에도 현실적으로 '버거운 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이 받아주지 않는 한 흰 코끼리는 '오랜 기간' 북한이라는 외딴 사육장에서 홀로 지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부시는 흰 코끼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오만한 방법을 택했다. 우리 같았으면 한 장관이 이역만리 태평양을 건너온 손님이니 백악관 안방으로 모셔 정중히 전달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부시는 흰 코끼리를 백악관 대문 밖으로 내보내 한 장관에게 전달하는 외교적 홀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은 선물 전달시간조차도 당일에야 통보 받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외교관례를 속속들이 모르는 민초의 과분한 기대인지는 모르지만 무시당하는 기분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클린턴의 대북접근이 모두 옳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문제를 푸는 방식에 있어서도 부시와 클린턴의 접근은 현격히 다르다. 클린턴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보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게 한 후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평양까지 달려가 그곳에서 담판형식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북한의 역학구조상 김 위원장과 직접 대화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경험에 입각한 고육책이었는 지 모른다. 그러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내비치고 있는 부시의 대북 대화수준과 상대는 미국관리의 뉴욕 북한대표부 관리 면담 정도가 고작이다. 사다리 맨 꼭대기 위 대화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사다리 맨 아래 단을 밟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어찌됐든 부시의 이번 대북대화재개 선언은 부시 행정부의 종래 의지와 방식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미국은 이미 모든 것을 사전에 다 확정해 놓고도 지난 3개월간 '검토 중'이라는 명분용 간판을 내걸고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한국은 '무거운 짐'에 불과한 코끼리 수령을 위해 워싱턴까지 찾아 온 셈이다. 미국은 이제 코끼리를 북한에 넘겨주었고 그 운명은 북한이 쥐고 있다. 북으로 들어간 코끼리를 다시 잡아 올 수도 없다. 속된 말로 북한의 '오야(?) 마음대로 시대'가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양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