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官妓'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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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때 문화계 인사들의 대소 연회에서는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이 '지화자'하고 외치면 나머지가 '좋다'라고 맞받아치는 건배풍습이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제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기발한 발상이라고 감탄한 사람도 있었으나 '기생파티'를 연상케 한다고 떨떠름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언제부터 관기가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때는 분명히 궁궐이나 지방 관청에 속해 가무(歌舞) 탄금을 하던 관기가 있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은 고려초 버드나무 가지로 고리짝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 온 탓으로 '양수척(楊水尺)'이라 불렸던 천민들 중에서 관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삼국통일을 이룬 왕건은 유랑하며 천업에 종사하던 북방유목민이나 귀화인의 후예,후백제의 유민들을 노비로 편입시켰다.
그중 악기연주나 노래 무용에 재주가 있고 미색이 뛰어난 젊은 여자는 관기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관청에 배속했다.
악학도감에서는 교방(敎坊)을 설치해 이들을 가르쳤고 여기도청(女妓都廳)을 두어 이들을 관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궁중의례 및 향연에서 가무를 담당했다.
고관들이 관기를 첩으로 맞아들이거나 집에 둔 예가 많았던 것을 보면 관기에 대한 공과 사의 구별은 확실치 않았다.
관기의 전통은 조선조에도 그대로 이어져 조선말까지 계속됐다.
유학자들의 반대로 궁중의례의 가무를 점차 남자에게 맡긴 것이 달라졌을 뿐 관기의 역할은 비슷했다.
'춘향전'에서 보듯 가무를 담당한 외에도 지방 수령의 수청기 노릇도 했다.
전북 도립국악원 예술단원들이 그동안 고위 관료들의 잔칫상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등 사실상 '관기'노릇을 해왔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심지어 관료부인의 계모임에까지 불려 다녔다고 한다.
국악의 본향에 현대판 변학도들이 출현한 꼴이다.
도가 자체감사에 나섰다지만 암행어사가 한번 출동해야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아닐까.
국악을 아직도 사사로운 술상에 곁들여지는 권주가 쯤으로 여기고 있는 관리가 있는 한 국악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