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생명 .. 김수이 <문학평론가>

티베트의 승려들은 '야르나스'라는 종교의식 기간에 한달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기 위해서다. 자연보호국 뉴질랜드에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후에 낚시를 한다. 하루에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수도 몇 마리에 불과하고 잡은 고기를 파는 일도 없다. 얼마전 유럽에서는 가축을 고통없이 도살하라는 이색적인 시위가 펼쳐졌다. 가축에게도 편안히 죽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생명존중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기록적인 가뭄에 가려있던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다시 급부상하고 있다. 가뭄 타개를 위해 묵인됐던 일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덫과 함정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을 찾기 위해 뚫은 수만개의 관정이 몇 백미터 아래의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하천 바닥에 파헤쳐진 웅덩이들은 수중생태 파괴와 인명사고의 위험을 유발하고 있다. 마치 대지에 파이프를 박고 여기저기 살을 도려낸 뒤 치료도 하지 않고 방치한 꼴이다. 훼손된 국토는 하룻동안 내린 비에도 벌써 침수피해를 겪었다. 곧 닥칠 장마에 상처투성이 국토가 무사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인간과 동물,유기물과 무기물,따뜻한 살과 차가운 흙은 '생명'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평등하다. 벌레를 밟지 않고 물고기를 잡지 않으며 가축을 편안히 죽게 하려는 마음처럼 흙과 바위와 하천을 생각하는 마음도 생명존중의 뿌리에서 자란다. 무기물도 엄연한 생명체다. 내가 마시는 공기와 땅,바람은 '나'라는 생명의 연장이자 생명을 품고 있는 모태다. 이들과 나는 하나의 탯줄로 연결된 어머니와 태아처럼 두 개의 생명이면서 하나의 생명이다. 모든 자연물은 어머니와 태아처럼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의 혈육이다. 특히 인간은 자연의 어머니에 대해 영원한 '태아'의 위치에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한다. 현대문명은 발전을 위해 온갖 위험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은 결국 '생명'의 위험이다. 생명을 착취하고 고갈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가뭄을 극복하는 방식이 가뭄보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