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散調 뿌리찾기

조선 후기 국악사에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의 하나는 민속악의 발전이다.전승돼오던 민속악이 궁중음악의 그늘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민속악중 성악의 꽃인 판소리는 18세기 후반에 오면 열두마당으로 정착돼 공연되기 시작한다. 뒤이어 19세기에는 기악의 노른자인 시나위와 산조가 등장한다. 시나위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무당 굿판에서 여러 악기로 합주되던 무속음악의 총칭이고 산조란 독주자가 장구 반주에 맞춰 연주하는 기악독주곡을 말한다. 고작해야 합주용이던 국악기가 산조라는 기악독주곡의 등장에 따라 독주용으로 재탄생한 것은 한국음악사상 획기적인 일이다. 산조란 명칭은 글자 그대로 '허튼 가락'이란 뜻에서 생겼다. 산조의 원형인 시나위나 판소리 가락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돼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심심파적으로 타보던 '허튼 가락'을 잘 짜여진 틀에 넣고 체계화시켜 1890년께 오늘의 산조형태로 만든 인물이 가야금 명인 김창조(金昌祖,1865~1919)였다. 그뒤 1896년 백낙준(白樂俊,1876~1930)은 거문고로 처음 산조를 연주했다. 대금산조는 박종기,해금산조는 지용구,피리산조는 최응래가 옛 명인으로 꼽힌다. 아쟁산조는 1950년께 한일섭이 가락의 틀을 짰다. 명인들에게 산조를 전수받은 제자들은 각기 다른 유파를 형성하면서도 스승의 독특한 산조의 틀은 계속 이어왔다.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의 가야금산조는 손녀인 김죽파(金竹坡)가 89년 타계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가락을 이어오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전수해 맥을 잇고 있다. 지난 4~5일 김창조의 출생지인 전남 영광에서는 산조가 생긴지 1백여년만에 많은 국악인이 모여 첫 산조학술회의를 열었다. 산조의 역사와 원형 예술성을 재점검하는 자리였다. 산조가 이처럼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산조라는 장르의 독창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큰 틀에 묶여있긴 해도 자유분방한 즉흥연주가 용인되는 것이 산조다. 최근엔 생각도 못했던 김덕수의 장구산조도 나왔다. 이런 새로운 기운이 국악의 창작열기로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