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심의 "변한게 없다" .. 자율심의 1년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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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차를 달리는 탤런트 박철.주변풍경이 낯설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어느새 평양거리에 도착해 있다"
연비가 높은 휘발유라는 점을 재치있게 표현한 이 광고는 하마트면 빛을 못 볼 뻔 했다.
심의에서 잠입탈출기도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어이없는 판정을 받은 것.
결국 제작진은 "광고적인 표현에 해당된다"는 검찰총장의 확인서를 받아 재심을 통과했다.
방송위원회에서 광고를 심의하던 98년에 있었던 해프닝이다.
이후 광고사전심의 기능은 민간기구인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로 넘어가 내달이면 1년째를 맞는다.
광고인들의 큰 기대속에 지난해 8월 자율심의가 시작된 후 심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최근 심의사례=화장실에 앉은 여학생이 멋진 벨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꺼낸다.
무엇에 감동했는지 그녀는 통화하면서 화장지를 계속 풀어대며 눈물을 훔쳐낸다.
장면이 바뀌어 학교 수돗가에서 양말을 세탁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광고는 끝난다.
화장지를 다 쓰버려 양말로 뒷처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한 휴대폰 벨소리업체가 만든 이 광고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방송불가판정을 받았다.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한국통신의 초고속인터넷 메가패스 광고는 우여곡절 끝에 전파를 탔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장군 동상을 이용한 게 "공적상징물의 부적절한 사용"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
제작진은 고민 끝에 주변건물을 지우고 이름도 메가패스장군으로 바꾸는 편법을 써 합격판정을 받아냈다.
심의는 불변=행정서비스는 좋아졌지만 심의의 내용은 변화가 없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컴온 김영호 상무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며 "광고제작시 늘 심의가 신경쓰인다"고 말했다.
B사 L감독은 "광고모델에 대한 심의위원들의 선입견 때문에 너무 엄격한 잣대를 적용받아 버리려던 컷을 재편집해 맥빠진 광고를 만들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자율심의 이후에도 심의내용이 변하지 않은 것은 심의위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방송광고 심의위원장인 한양대 조병량 교수는 "방송위원회에서 정한 규정에 맞춰 심의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변화를 바라는 자체가 지나친 기대"라고 설명했다.
문제점과 개선책=광고주협회 박효신상무는 "시대변화에 뒤처지고 형평성을 잃은 심의규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자율심의 1년의 결론"이라고 말한다.
골프용어인 라이,라운딩이란 표현은 가능하지만 증권용어인 데이트레이딩,랩어카운트는 못쓴다는 설명이다.
제품에 표시된 슬로건만 광고로 표현할 수 있다는 규정때문에 뒤늦게 "디지탈 익사이팅"이란 문구를 표시하기도 했다.
또 광고인들은 "심의위원들이 소비자를 계도해야 할 존재로 보고 자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게 문제"라고 주장한다.
광고의 상업성과 전달매체의 공익성을 조화시키는 균형감각이 있는 심의위원을 뽑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