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다시 생각해보는 입헌주의..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며칠이 지났으나,제헌절이 던져주고 있는 화두가 '입헌주의'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입헌주의는 정치권력의 제한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인치(人治)보다는 법치(法治)를 역설하고,권력집중보다는 권력분립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예로부터 정치권력은 공익과 공공선 제고를 명분으로 하면서도 현저하게 오·남용돼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에 관한 한 '화무십일홍이요,권불십년'이라거나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라는 등, 비아냥거리는 준칙들이 적지 않다. 또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이러한 준칙들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유다 왕국의 왕 헤롯은 살로메에게 춤을 추게 한 다음 살로메의 소원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다. 이상한 수수께끼를 내고 문제의 수수께끼를 푸는 남자에게 공주의 부마로 삼고 나라의 반을 떼어 주겠다고 호언한 왕도 있었다. 백제의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도미의 아내와 동침하려다 실패하자,도미의 두 눈을 빼고 귀양을 보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이처럼 노골적이며 저돌적인 권력의 오·남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경우 당장 반인권·반인륜 정부로 낙인찍혀 권좌에서 추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국가에서도 은밀하고 정교한 형태의 권력 오·남용이 있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대통령 탄핵의 경험을 가진 나라들이 이점을 입증하고 있거니와,어떤 나라들은 아예 권좌에 있는 대통령이나 수상의 특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범법행위를 가차없이 기소하기도 한다. 뭐니뭐니해도 교묘한 권력 오·남용의 원조는 단연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왕일 것이다. 다윗왕은 홀로 목욕하고 있던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보고 그녀를 탐낸 나머지 우리아를 격전지에 보낸다. 그 결과 우리아는 전사했고 다윗은 그의 아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외견상 왕이 특정 장군을 격전지에 보낸 것을 두고 권력의 자의적 남용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군의 총사령관인 왕이 장군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당한 통치권의 행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아를 격전지에 보낸 다윗왕의 '의도'였다.그 의도는 다윗 이외에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분명히 사악했기 때문에 예언자 나탄의 매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사례는 정당한 통치행위라도 통치자의 의도에 따라 굴곡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입헌주의는 법집행자의 의도가 선하고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속적인 민주사회에서 법을 집행하는 통치자와 정부의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언자는 없다. 다만 상황들을 추측할 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입헌주의는 준수되고 있는 것일까? 헌법의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일까? 정부가 '개혁'의 이름으로 시장에 개입할 수는 있겠지만,관치금융의 지경까지 갔다면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부실기업 가운데 어떤 기업은 봐주고 어떤 기업은 봐주지 않는다면,정부개입의 의도는 공정한 것이 아니며,'고무줄 잣대'에 불과하다. 또 정부가 징세권을 발동해 언론사 세무조사를 할 수 있지만,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정부는 '조세정의'라고 강변하고,관련된 언론사는 '언론탄압'이라고 절규한다. 이 문제를 두고 방송사와 신문사가 갈라지고,지식인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며 여야가 다투고 있다. 일찍이 궁예가 '관심법'을 쓰다가 망한 이후 관심법을 쓰는 사람도 없어 정부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그렇지만 정치권력의 '공정성'과 '형평성'이 격렬한 쟁점의 대상이 되는 일만큼 불행한 사태는 없다. 정부의 공정성이 의심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의 오·남용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뜩이나 할 일이 산적한 정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또 민주화의 결실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입헌주의는 여당의 정권 재창출이건,야당의 정권 탈환이건 관심이 없다. 그 보다는 통제된 권력이 공익을 위해 공정하게 행사되기를 요구할 뿐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