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6) '김우중은 산업화 시대의 인물일뿐...'
입력
수정
"김우중 회장은 산업화시대의 인물일 뿐"
국민의 정부에서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김 회장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우문제가 숨가쁘게 돌아가던 98,99년 누구보다 자주 김 회장을 만났고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과 함께 대우문제를 처리했던 사람이다.
대우쪽 사람들은 강 원장과 김 회장의 관계가 매우 나빴고 그것이 정부내 '강경론'이 그렇게 강했던 배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 회장의 면담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대통령 면담 일정은 의전수석실 쪽에서 잡는다.
김 회장 등 경제인사를 만날 때는 경제수석으로서 당연히 배석했다"
-김 회장이 주로 어떤 말을 했나.
"김 회장은 무역금융 등 많은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대통령의) 판단을 돕기 위해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기업 전체에 대한 지원을 얘기하면서 실상은 대우를 지원해 달라면 곤란하지 않은가"
-5백억달러 무역흑자론은 어떻게 봤나.
"김 회장은 수출을 늘리면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수입감소로 흑자가 난다고 봤다.
이는 철학의 차이다"
-대우 정리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나.
"특별히 보고한 적 없다.
대우문제는 시장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자금조달 길이 막힌 것이다"
-대우쪽에서 각본설을 주장하는데.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대우사람들은 정치적 시각에서 보는 것 같다.
각본이 있을 수 없다"
-당시 대우의 가장 큰 문제는.
"기업규모가 그 정도로 커졌는데도 김 회장이 혼자 끌고 갈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정부에서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구조조정본부장에게도 결정권이 없었다.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
-대우 워크아웃은 어떻게 결정했나.
"99년 6,7월께 그룹전체를 워크아웃에 넣는 검토가 있었다.
당시 재경부는 큰 계열사 4∼5개만 워크아웃에 넣자고 했다.
반면 금감위는 계열사간 자금대차관계가 얽혀 다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 12개사가 결정됐다"
-대우의 긍정적인 면은 없었나.
"대우라는 브랜드를 세계시장에 심어놓은 점은 인정해야겠지"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