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쌓다 만 둑' .. 김학원 <자민련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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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원
사람마다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이 다를 테지만 바다를 바라보면 어쩐지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어릴 적 기억에서 온 것이리라.
어린시절 고향 농촌에선 여름에 홍수가 날 때마다 백마강이 넘쳤다.
우리 논밭을 포함한 온 들판은 물로 뒤덮여 마치 바다처럼 돼 버리곤 했다.
땀 흘려 가꾼 아까운 곡식들이 물에 잠겨 썩어갔다.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은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내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어린아이들이 철없이 장난치고 히죽거리면 어김없이 어른들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부터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홍수에 뒤덮인 논밭이 연상돼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런데 더욱더 농민들을 울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선거 때가 되면 국회의원 출마자들이 저마다 농민들의 숙원사업인 '둑'을 쌓아 홍수를 막아 주겠다고 공약했다.
그중 여당의 한 현역의원은 정부를 움직여 실제로 둑을 쌓기 시작했다.
유권자인 농민들은 그 의원이야말로 둑을 쌓아 주리라고 믿고 표를 찍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당선사례'라는 벽보를 붙인 다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둑을 쌓던 불도저는 주인없이 멈춰 있다가 몇 달 지나면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 선거 때가 되면 또다시 '둑'을 쌓아 주겠다는 공약이 나왔다.
먼저보다 조금 더 길게 둑을 쌓아가면서….
올해도 또 다시 홍수로 인해 '쌓다 만 둑'의 모래가 쓸려가 농민들의 생명터인 논밭을 뒤덮어 버렸다.
차라리 '쌓다 만 둑'이라도 없었다면 홍수로 고통받고 논밭에 뒤덮인 모래를 치우느라 고통받는 이중고통만은 없었을 텐데.
언제쯤이면 우리 선거풍토에서 유권자들을 울리는 이런 '쌓다 만 둑'이 사라질 것인가.
지금 나는 어떠한가.
알면서 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역민들에게 '쌓다 만 둑'과 같은 공약을 하는 일은 없는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