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투데이] 인터넷의 새로운 국경
입력
수정
[ The Economist 본사 독점전재 ]
지난 1996년 2월 인터넷의 전도사로 통하던 존 페리 배로는 '사이버공간 독립선언'을 공표했다.
선언문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인터넷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도구로 천명했다.
배로는 여기서 "산업세계의 정부는 이제 (인터넷공간을) 떠나라.정부는 인터넷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다.인터넷을 지배할 도덕적인 자격도 없다.우리를 제재할 만한 수단도 없다.사이버공간은 각 정부의 국경안에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당시는 인터넷이 정부권한을 대폭 축소해 나갈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정부의 징수능력도 줄어들며 결과적으로 모든 제재도 철폐되리라 생각됐다.
인터넷은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로 간주됐다.
하지만 이같은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각국은 사이버공간에 대해 엄격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구름이 흘러가듯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인터넷이 지금은 특정국가에 예속돼 있다.
법의 규제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인터넷을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리란 생각은 그 골격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때의 얘기다.
인터넷의 발명 이후 모든 신기술은 네트워크로 통합됐다.
또 신기술 대부분이 상업적인 목적을 갖게 됐다.
이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부에 규제를 요청하는 사례도 생겼다.
침입자로부터 기업 전산망을 막아내는 방화벽이나 여과기술은 중국 등의 인터넷 이용자가 서방세계와 대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이 됐다.
중국정부는 인터넷을 통한 민주화 바람을 효과적으로 차단해왔다.
중국의 인터넷동향에 관한 보고서를 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최근 "인터넷의 확산이 권위주의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싱가포르와 사우디아라비아도 인터넷 콘텐츠를 감시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도박사이트에 대한 접근이 차단됐다.
이란에서는 어린이들이 인터넷을 항해할 수 없다.
이들 나라는 정부규제가 인터넷에도 적용되는 사례다.
이같은 관행은 인터넷 규제가 심하지 않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는 현실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분쟁도 끊이지 않는다.
이들 분쟁은 실제 법정에서 실정법의 적용을 받는다.
명예훼손같은 죄목은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온라인에 똑같이 적용됐으며 다른 법률도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최근 프랑스의 한 판사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야후가 자국내에서 나치관련 상품을 취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야후는 즉각 항소했다.
이번 판결이 웹사이트 운영업체 스스로가 각국 법에 맞춰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드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언론자유를 심각히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물론 감시기술이나 사이버 국경이 항상 튼튼한 것만은 아니다.
방화벽은 언제나 뚫릴 수 있다.
e메일에 강력한 보안장치를 걸면 정부도 제대로 감시할 수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자신의 웹브라우저도 제대로 모른다.
따라서 인터넷이 권위주의 정부를 변화시키리란 생각은 순진한 발상이다.
각국 법률은 이미 인터넷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지형에 따른 국경은 인터넷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인터넷이 자유주의를 확산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각국 법에 따르는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규제가 전혀 없거나 한 나라의 법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된다고 상상해보라.
규제가 없으면 인터넷세계는 사기와 범죄가 판을 치게 될 것이다.
또 문화적 배경이 다른 국가들이 하나의 법으로 통일시킨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나라마다 언론자유 포르노 도박 등에 대한 규제수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어떤 콘텐츠가 어느 나라 법률에 저촉되는지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나 기업은 온라인 상거래가 특정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그래야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터넷은 해상이나 항공에서처럼 여러 법률을 동시에 충족시키게 될 것이다.
각국 법을 존중하되 만약 상충된다면 상위 국제법이나 국제관행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현실을 지배하는 법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넷 역시 현실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리상으로 구분된 모든 국경이 그랬던 것처럼 인터넷의 초창기는 무법천지였다.
하지만 결국 경찰은 등장하게 된다.
정리=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
◇이 글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8월17일자)에 실린 커버스토리 'The Internet's new borders'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