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신기루와 오아시스 .. 김낙훈 <벤처중기부장>
입력
수정
붉은 해가 사막 너머로 사라질 무렵 바라보는 피라미드의 웅장함은 압권이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열사(熱沙)의 한복판에 있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한쪽 변의 길이가 2백m가 넘는 엄청난 구축물이다.
파라오의 절대권력 아래서 피땀흘리며 돌을 나르는 노예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피라미드는 인류사의 불가사의중 하나다.
그많은 돌은 어디서 구했고 이 큰 돌을 어떻게 운반해 정교하게 쌓았을까.
불가사의한 것은 피라미드 뿐이 아니다.
한국에도 불가사의한 게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중소기업정책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봐도 한국처럼 다양하고 정교한 중소기업정책을 갖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
자금지원만 해도 수십가지.인력,세제,입지지원 등을 합치면 몇가지가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 같다.
한데 희한한 것은 그런 지원책이 있는 데도 중소기업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런 정책을 수십년 동안 시행해왔다면 중소기업은 지금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도 남아야 마땅하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이 경제강국이 된 것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밑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다.
이탈리아를 보자.밀라노 등지에는 수천개의 가구업체가 몰려 있다.
직원이래야 10∼20명 수준의 영세기업들.하지만 이들이 수출하는 가구는 연간 1백억달러에 이른다.
이탈리아 경제는 첨단산업이 아닌,바로 이들 미들테크(middle-tech)나 로테크(low-tech)의 중소기업이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이탈리아와 비슷한 종업원과 업체수를 지닌 한국 가구업체들의 수출액은 연간 2억달러. 이탈리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선두권 기업중 상당수가 법정관리나 화의에 들어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업종도 비슷하다.
경쟁력을 높여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부도위기를 넘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장들이 너무 많다.
지원책이 다양한데도 중소기업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그중 하나의 단서는 '지원책'이라는 신기루에 있다.
중소기업은 경제의 실핏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각 부처는 앞장서 중소기업 '지원책'을 마련했다고 발표한다.
지원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보면 '지지해 돕는다'고 풀이하고 있다.
한마디로 도와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책중 대표격인 자금 관련 정책은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대출이다.
그것도 철저히 담보를 챙겨서 이자를 받고 돈을 내주는 영업행위다.
이게 무슨 지원인가.
이런 용어를 쓰다보니 중소기업은 지난 수십년동안 엄청나게 특혜를 받은 것처럼 비쳐진다.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벤처캐피털은 약 3조7천억원을 중소·벤처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지원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돈을 모아 벤처에 투자하는 펀드매니저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주식을 가급적 싸게 매입해 '자본이득(capital gain)'을 실현할 뿐이다.
용어의 혼동은 정책의 혼선을 가져온다.
중소기업의 사기도 떨어뜨린다.
'지원'받은 기업은 무슨 지원을 받았느냐고 반문한다.
못받은 업체는 왜 나만 소외시키느냐고 불만에 가득 찬다.
중소기업정책을 이끄는 중소기업특위위원장 중소기업청장 등 수장들이 이구동성으로 중소기업정책을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야말로 복잡다기한 중소기업정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돈하자.불필요하고 중복된 것은 없애고 꼭 필요한 것은 알기 쉽고 투명하게 만들자.그래야 신기루를 오아시스로 오인하고 사막에서 헤매다 쓰러지는 중소기업들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