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13) '무너지는 모래성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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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가 어려워지면서 금융기관들도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이 회수하면 나는 더 빨리 회수해야 하는 것이 행동준칙으로 자리잡은 지도 오래됐다.
어떤 기업이든 일단 어렵다는 말이 돌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남은 살점이라도 뜯어먹어야 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말했던 소위 "자살 경쟁"이었다.
나라 안팎에서 돈줄이 막힌 대우는 더할 나위도 없다.
우리의 주인공인 대우는 99년 봄이 되면서 극심한 보리고개를 맞았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호흡기를 언제 떼느냐만 남았고 정부는 급기야 장례식(그룹해체) 준비에 들어갔다.
이기호 수석의 첫 업무
99년 5월초 경제수석실.
이진순 KDI 원장과 이동걸 연구위원이 신임 이기호 수석에게 경제현안을 보고하러 갔다.
대우문제 극비 보고서를 작성한 이 위원은 단도직입적으로 요점으로 들어갔다.
"대우가 테크니컬 디폴트 상태입니다. 공식자료 외에 해외지사나 숨겨진 부실을 감안하면 실상은 더욱 나쁠 겁니다. 대책이 시급합니다"
허리를 숙여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이기호 수석이 보고서를 '탁' 소리가 나도록 덮으며 의외의 말을 했다.
"이 박사, 이거 신문에 나가면 큰일 납니다"
이동걸 위원은 미국 예일대 선배인 김태동 정책기획수석 밑에서 98년말까지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진작부터 대우문제를 주시해온 터였다.
다음은 이동걸 위원의 증언.
"정부차원의 "대우 대책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청와대가 움직였다는 얘기가 새나가면 말그대로 무방비 상태에서 파장만 커질 것이 우려됐습니다. 대우가 망가지면 구조조정도 새로 해야 하고 그때까지 은행에 넣었던 공적자금 20조원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쁘기만 했던 류시열 행장
이에앞선 99년 4월15일 오전 11시.
대우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 류시열 행장이 이호근 상무를 대동하고 김우중 회장 집무실을 찾았다.
류 행장은 이날 대우의 수정 재무구조 개선계획에 퇴짜를 놓은 터였다.
"연내(99년)에 86억달러 외자유치라니... 도대체 가능한 이야기를 해야지 말이야"
류 행장은 앉자마자 담판을 지으려는 듯이 강경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김 회장님, 이대로는 안됩니다. 제발 말로만 팔겠다고 하지 말고 단 한건이라도 팔아서 실제로 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류 행장은 "실제로 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 했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자꾸 채근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무조건 팔기로만 나가면 팔리지도 않고 값만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김 회장은 짜증을 냈다.
그는 또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며 "무턱대고 거둬가니 누군들 견디기 어렵지 않소. 제일은행에도 섭섭한 점이 많아요"라고 말했다.
두사람은 몇차례 더 만났지만 언제나 평행선이었다.
제일은행은 사실 제 코가 석자였다.
뉴브리지로의 매각작업이 한창이었다.
대우로서는 운도 나빴다.
조선을 팝시다
김 회장은 4월15일 류 행장과 만난뒤 돌연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갔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훌쩍 해외로 나가던게 습관이기도 했다.
나흘뒤(19일) 김 회장은 대우빌딩에서 주력인 대우중공업 조선부문을 포함, 힐튼호텔 다이너스카드 전기초자 대우기전 등 10여곳을 매각해 (정말로) 부채를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98년 12월에 이은 2차 구조조정 계획이었다.
자동차중심의 소그룹화 방안도 이때 나왔다.
이 구상은 김태구 구조조정본부장이 내놨다.
그룹 핵심인사중 몇 안되는 비(非) 경기고 출신인 김 본부장은 회장에게 "자동차를 살리려면 조선을 버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 회장이 4월말 중국을 다녀온뒤 머리 핏줄이 다시 터졌다.
결국 이마저 흐지부지됐다.
천운(天運)도 따르지 않았다.
회계 등식
4월이 분수령이었다.
하루 만기도래 CP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6개월전 노무라보고서 파문과는 비교가 안됐다.
한장의 발표문이 다시 대우를 뒤흔들었다.
4월초 공정거래위원회가 30대 그룹 현황을 발표했다.
대우가 자산규모에서 삼성을 제치고 재계 2위에 랭크됐다는 내용에 시장의 눈길이 날아가 박혔다.
옛날 같으면 축하할 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산은 곧, 부채"라는 것은 IMF가 던져준 회계등식의 골자였다.
4월2일 교보생명은 1천5백억원의 만기상환을 요구해 왔다.
물론 교보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대우는 "부도를 낼테면 내라, 갚을 돈이 없다"고 버텼다.
결과는 3개월의 만기연장일 뿐이었다.
19일 2차 구조조정계획이 발표되자 대우 주가는 초강세였다.
그러나 워크아웃설이 나돌면서 김 회장 "결단"(이헌재 금감위원장의 평가)의 약발도 며칠 가지 않았다.
제일은행 남산지÷?제외하곤 모든 당좌계좌가 폐쇄됐다.
남산지점 관계자는 "대우가 갚아야 할 자금이 3월까진 하루 몇 천억원이었지만 4월말엔 1조원을 넘겼고 5,6월을 지나 7월이 되면서 하루 3조~5조원으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눈덩이 그 자체였다.
3개월짜리 CP가 막판에는 하루짜리 콜로 바뀌었다.
고난의 계절이었다.
기댈 언덕이라고는 김 회장의 친구이기도 했던 대우증권 김창희 회장만이 남았다.
다음은 대우증권 자금부 관계자의 증언.
"이곳저곳서 돈을 끌어다 계열사 자금 막는게 일이었습니다. (주)대우의 자금담당 임원은 매일 저녁 대우증권으로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7월16일에는 자금부 직원들이 일찍 퇴근했습니다. 자금사정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끝내 두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우증권 자금담당 임원은 지금 대우증권 사장을 맡고 있는 박종수씨였다.
청와대, 등을 돌리다.
김대중 대통령은 4월6일 국무회의에서 "5대그룹 자산이 1년전보다 37조원이나 늘어났다" 힐난했다.
김 대통령은 대우문제가 보고될 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5백억달러 무역흑자론을 칭찬하던 대통령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4월이 지나면서 "원칙대로 하라"고 말했다.
경제팀이 대우해체로 방향을 튼 것은 이 무렵이었다.
대우는 부랴부랴 대우투자자문을 미국에 팔고 경제연구소 지분 50%를 SK와 금호에 넘겼다.
금융통인 황건호 대우증권 부사장을 구조조정본부로 끌어올려 계열사 M&A를 맡겼다.
7월초엔 그룹 사장단을 대거 퇴진시켰다.
그러나 엎질러진 뒤였다.
김 회장은 뒤늦게 "GM과의 자동차 합작을 너무 낙관했다"고 후회했다.
김 대통령은 기정사실로 여겼던 50억달러 협상이 깨지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김 회장, 못믿을 사람이군"
이제 아무도 김 회장과 대우를 돕지 않았다.
[ 특별취재팀 =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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