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우리도 '301조'가 필요하다..안덕근 <KDI 경제학 교수>

안덕근 한·미 통상마찰하면 누구나 '301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이 301조는 1974년 미국 무역법에 의해 처음 마련되어 지금까지 1백20여차례 발동됐다. 우리는 9차례나 그 타깃이 되었다. 특히 88년엔 한햇동안 세차례나 그 공격대상이 된 적이 있다. 그런데 '301조'하면 흔히 '무소불위의 무역보복조치'로만 인식할 뿐,정작 이 규정의 중요한 순기능에 대해선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GATT체제는 물론 현재의 WTO체제에서도 국제통상규범에 입각한 통상분쟁의 해결은 순전히 정부의 몫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기업이 해외시장에서 명백하게 WTO규범에 반하는 부당한 무역규제를 당한 경우에도,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를 설득해 해당 수입국 정부를 WTO에 제소해야 한다. 아무리 수익규모가 큰 기업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국제통상무대의 실질적 주체는 기업이지만,통상분쟁의 해결에 있어서는 반드시 정부가 대리인으로 기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는 통상의 주체인 기업이 국제통상무대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어떻게 정부를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업계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정부가 사안별로 적절한 정책적 지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그와 같은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제도적으로 마련된 절차에 따라 진행되게 한 것이 바로 301조의 설립 취지다. WTO 출범 이후 유럽연합(EU)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소위 TBR제도도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기타 선진국들도 이와 유사한 체제를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이러한 제도의 도입을 서둘러야 할 때다. 우리는 국민총생산의 70%를 교역에 의존하는 그야말로 '통상입국'이다. 그런 만큼 수출에 매진하는 우리의 기업들은 해외시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무역규제로 피해를 보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주요 선진국 뿐만 아니라 수출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개발도상국들까지도 이러한 무역제재조치를 강화하는 추세고,이러한 추세는 심화되는 세계경기침체와 맞물려 악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우리 기업들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선 미국이 도입한 301조라는 제도를 우리도 갖추어야 한다. 한편 우리 정부는 '슈퍼301조'운운하며 제기하는 미국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더 이상 응할 이유가 없다. 국제통상규범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무역보복권한을 유지하려는 미 의회의 노력은 WTO규범에 합치하는 방식으로만 이를 행사하도록 한 WTO 분쟁해결기구의 99년 판결에 의해 상당부분 제약을 받고 있다. 즉 WTO규범을 무시한 채 USTR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거, 우리 수출품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것은 WTO규범에 의해 금지돼 있다. 80년대 우리 제품과 시장에 대한 무소불위의 '301조 보복조치'는 이제 그야말로 옛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86년부터 8년여에 걸친 우루과이라운드에 의해 WTO회원국들이 이루어 놓은 현재의 국제통상체제다. 따라서 나날이 고조되는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올바른 대응은 그러한 통상압력을 어떻게 적당히 무마시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통상체제와 정책이 얼마나 국제통상규범에 합치하는지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제와 정책이 WTO규범에 문제가 없는 경우 우리의 교역상대국-그것이 미국이건,어느 WTO 회원국이건-에 의한 무리한 통상압력에 주눅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미국정부의 최근 통상압력에 대해 걱정되는 점은 슈퍼301조를 들먹이며 문제를 제기해서가 아니라 그 요구에 우리의 정책이나 조치가 국제통상규범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미국의 일방적 통상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WTO규범에 의해 우리의 체제가 문제시되며,그 규범에 대한 준수가 강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 슈퍼301조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때다. dahn@kdischool.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