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벼골.망해사'] 숨쉬는 개펄.벼익는 들녘 '생명의 합창'

조금은 이른 편이다. 황금들녘은 달포를 더 기다려야 한다. 내려가는 길가엔 고개 숙인 조생종 벼들이 눈에 띄지만 조생종이 거의 없는 이곳은 사방이 초록뿐. 풋내가 나는 건 아니다. 원숙한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대지의 자양분을 들이켜고 벌써, 또 문턱을 넘어선 가을햇살을 받아들이며 대롱마다 생명 대순환의 한 연결고리를 알알이 매듭짓고 있는 참이다. 정착과 문화발생의 원천 에너지가 온 들녘 위로 솟구치는 것 같다. # 벼골 하늘과 땅이 수평으로 만나는 곳, '징개 맹경 외야미들'(김제.만경평야)의 한복판에 선다. 넓기도 하다. 일제때 간척공사로 생긴 광활면처럼 그야말로 광활하다. 무릎아래 펼쳐진 초록의 생명융단. 어디가 끝이며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모르겠다. 중간중간 작은 마을이 아니면 더 통쾌할 것 같기도 하고, 더 외로울 것도 같다. 한반도 도작문화의 1번지인 이곳의 중심은 김제. 예전엔 사금도 많이 나 김(金)이고, 벽골 제방(堤)이 유명해 김제이다. 벽골제는 쌀이 많이 난다는 "벼(稻)골"에서 비롯된 한자표기. 국내 최대 최고의 인공저수지다. 모악산에서 흘러내린 원평천과 두월천의 합류지점을 막아 물을 가두었다. 무려 3천만평의 논에 물을 댔다고 한다. "둑의 길이는 10여리, 저수지 둘레는 1백리에 달했다. 배가 닿는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주변 마을을 연결해 보면 정말 큰 저수지였음을 알수 있다"(김병학 김제문화원장) 축조시기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 삼국사기에는 당시 신라인이 쌓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는 이곳이 백제땅이었으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김 원장은 설명한다. 인근 "신털미산"이란 작은 산의 이름이 묘하다. 조선 태종 15년 보수공사때 인부들이 해진 짚신을 버리고, 짚신에 묻은 진흙을 털기도 했는데 그것이 쌓여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게를 진 인부를 세우면 정확히 5백명이 되는 크기의 논 "되배미"는 되질 하듯 인원을 파악하고 작업배치를 했다는 지점. 완도란 섬 이름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신라 문성왕 13년(851년)에 청해진 장보고의 잔존세력을 이곳으로 끌고와 제방공사에 투입했다. 이들이 완도를 그리며 "빙그레 웃었다"고 해서 완도가 되었다는게 자생풍수를 연구하는 최창조씨의 주장. 현재의 벽골제는 일제에 의해 메워져 좁은 수로와 한개의 무네미 수문 등만 남아 있다. 조성된 수리민속유물전시관 등에서 도작문화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 망해사 심포리의 망해사로 간다. 서해안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접한 작은 사찰. 검은 뻘 위에 얹혀진 낡은 배와 백합망태기를 머리에 인 아낙들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인 곳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외야미들"이 더욱 시원스레 펼쳐진다. "품앗이로도 농사지을수 없어 외지사람들이 많이 들어 왔는데, 지금도 40~50%가 외지에서 와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김 원장의 설명이 절로 이해된다. 풍요로운 만큼 수탈도 심했다고 한다. 특히 죽산면 일대는 일제때 착취가 심해 조정래씨의 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되었다. 바다쪽으로 등을 돌리면 너른 뻘 너머 군산, 옥구땅이 아스라하다. 왼편으로는 심포항이 보인다. 이곳의 뻘은 수라상에 진상되었다는 백합(생합)으로 유명하다. 누구든 들어가 백합을 캐갈수 있다. 뻘은 사라질 운명이다. 논란 끝에 다시 시작된 새만금방조제가 완성되면 새로 생기는 아주 거대한 땅의 서쪽 일부로 바뀌게 된다. # 축제 김제시는 20일부터 나흘간 지평선축제를 벌인다. 올해로 3회째. 메뚜기잡기, 지평선연날리기, 황금들녘 우마차여행 등의 농촌문화 체험행사를 많이 준비했다. 갯벌탐사와 조개캐기대회, 망둥어낚시대회 등 해양체험행사도 곁들인다. 입석줄다리기 등 풍년을 기원하며 남녀로 나눠 벌였던 민속놀이 공연도 준비했다. 김제=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