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인 탐구]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 '유리알 경영'
입력
수정
동국제강 사옥은 서울 을지로 입구 내외빌딩 뒤에 있다.
학교(청계초등학교)로 쓰던 2층짜리 구식 건물이다.
앞쪽의 빌딩 숲에 가려 큰길에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재계랭킹 21위 그룹의 사옥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옹색하다.
장세주 회장의 집무실은 이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다.
부친인 고 장상태 회장이 쓰던 그대로인 이 사무실에는 으레 있을 법한 유명화가의 그림이나 조각 같은 장식물도 없다.
근면과 검소의 상징, 그 자체다.
장세주 회장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기자와 만난 장세주 회장은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부터 꺼냈다.
그들로부터 기업인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배웠다는 것.
장 회장의 할아버지 고 장경호 회장은 동국제강의 창업자.
지난 75년 사재 35억원(지금기준으로는 2천여억원) 상당의 유가증권과 부동산, 현금을 불교계를 포함한 사회에 쾌척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고 장경호 회장은 거액을 주저없이 기부하면서도 스스로는 근면과 절약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장세주 회장은 "할아버지께서 부산공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시면서 땅에 떨어진 못이나 쇠조각이 눈에 띄면 책임자를 불러 공장이 떠나가라고 야단을 쳤던 일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고철을 원재료로 갖다쓰는 전기로 업체들 사이에 '고철은 쌀이다'라는 말이 퍼진 것도 이런 일화에서 비롯됐다.
장 회장은 또 힘들 때마다 조모(추선화씨)가 가르쳐준 교훈을 떠올린다.
"지난 65년 할머니께서 동국제강 부산제강소 건설 당시 공장 근로자들에게 새참으로 국수를 나눠 주던 때였다.
일꾼들이 국수를 함부로 버리는 것을 본 할머니가 땅에 떨어진 국수를 대나무 소쿠리에 주워담은 뒤 다시 끊여 직접 먹어보이던 일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부.조모때부터 물려받은 이같은 근면.검소한 가풍은 장세주 회장의 경영철학에 그대로 녹아 있다.
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신중한 '내실중시' 경영이 그것이다.
현재 서울 본사 건물터가 빌딩을 신축하기에 적합하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게 좋은 예.
동국제강의 기술수준이 세계 톱 클래스로 올라선 이후로 사옥신축을 미루기로 했다.
장 회장은 "외형에 치중하는 낭비와 허례허식 경영은 결국 거품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냄새를 풍기는 그런 기업인은 아니다.
그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개방적인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는 동국제강 사장 시절 이사회를 노조는 물론 협력업체 사장들에게까지 공개하는 투명경영과 임원들의 업무성적을 1등부터 꼴찌까지 공표함으로써 책임감을 유도하는 책임경영을 펴보였다.
장 회장은 무려 23년 동안 경영수업을 받았다.
오너의 아들들이 중견간부나 임원부터 시작한 것과 달리 그는 78년 사원으로 입사했다.
동국제강 회계·기획과 근무가 그룹내 첫 직장이었다.
동기들과 격의 없이 지내던 일이며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어울려 족구 배구 등을 하던 모습은 영락없는 보통 샐러리맨의 회사생활이었다.
오너의 장자로 특별대우를 받은게 아니라 직원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며 어울렸다.
사원들과 장 회장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동국제강이 특유의 노사화합문화를 유지해 가는 데도 큰 힘이 되고 있다.
회계과에서는 숫자감각을 키웠다.
경영현황에 대한 담당자의 숫자 실수를 지적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기획과에서는 약 1년반 동안 근무했다.
연간 기획과 주요 현안의 대처방안 등을 직접 기안하기도 했다.
장 회장은 이후 인천제강소 제강과 대리, 본사 회계과장, 일본지사 차장, 기획실장, 영업본부장, 인천제강 소장을 거쳤다.
천양항운 동국중기(한국철강에 합병돼 지금은 없어짐) 등 계열사에서도 근무했다.
전기로업체의 원재료인 고철을 직접 다루면서 사실상 철강업의 매커니즘과 경쟁력에 눈을 뜨게 된 것.
동국제강 인천제강소장 때는 설비 합리화를 이룩했다.
장 회장은 "당시 전기로 메이커는 교류전기가 사용됐으나 전력비가 적게들고 생산성이 뛰어난 직류전기로의 전환을 놓고 회사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장상태 회장에게 주청을 드려 직류전기로 전환 확답을 받아냈을 땐 날아갈듯한 기분이었다"며 지금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후 기획단계에서부터 공장신축, 공장운영, 기술 도입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배워 나갔다.
연산 1백40만t 규모인 인천공장은 현재 황금알을 낳는 철근공장으로 회사수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경영자로서 판단과 혜안은 지난 96년에도 발휘됐다.
주력공장이던 부산제강소를 폐쇄하고 포항지역에 주력 생산기지를 건설키로 그룹이 진로를 정한 때였다.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지을 것인가로 그룹이 고민하고 있었다.
장 회장은 "결과적이지만 그때 나서서 후판공장을 짓자고 우긴게 천만謀敾潔駭?며 웃는다.
포항공장은 현재 연산 1백50만t의 후판을 생산하고 있으며 오늘날 동국제강의 사세를 키우는데 결정적 힘을 실어준 공장이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동국제강은 포항에 후판공장을 신설함으로써 기존 1후판(1백만t)공장과 함께 연산 2백50만t에 달하는 세계 3위의 후판메이커로 우뚝섰다.
장 회장은 "동국제강은 철강업으로 수직계열화된 그룹이다. 동국제강은 전기로업체며 연합철강은 냉연메이커, 국제종합기계는 동국제강과 연합철강의 철강제품을 원재료로 쓰는 농기계업체, 국제통운과 천양항운은 고철 핫코일 등의 철강원자재를 운송 하역하는 업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철강기업의 경쟁력은 공장에서 나온다'는 그의 평소 소신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동국제강그룹을 어느 정도의 반열까지 올려 놓을지 주목된다.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
---------------------------------------------------------------
[ 약력 ]
1953년생
76년 연세대 이공대 졸업
78년 동국제강 입사
80년 동국제강 인천공장 제강과 대리
81년 미국 토슨대 경제학과 졸업
81년 동국제강 회계과 과장
83년 일본지사 차장
88년 천양항운 사장
99년 동국제강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