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미국의 부메랑 '빈 라덴'..이동우 <기획취재부장>

1979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청년사업가 오사마 빈 라덴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경영학과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가업인 건설업을 물려받은 22세의 빈 라덴은 사우디왕가와도 교분이 두터운 전형적인 아랍의 젊은 부호였다. 그는 비즈니스보다는 이슬람근본주의에 심취했지만 훗날 서방세계 공적1호 테러리스트로의 변신을 예감케할 정도로 극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붉은군대의 아랍형제국 침공에 분노한 수많은 아랍 젊은이들과 함께 의용군에 자원한다. 아프간전선으로 향한 아랍청년은 2만명을 헤아렸다. 아랍의 반소연대에 미국은 쾌재를 불렀다. 소련과의 데탕트(평화공존)를 폐기하고 공산주의를 분쇄하는 전략을 채택한 당시 미국의 강경보수 레이건정부는 아랍특유의 단결력을 반소전선에 십분 활용했다. CIA요원을 침투시켜 아프간전사(무자헤딘)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게릴라전 기술,소련군정보를 제공했다. 무자헤딘을 도와 반소 게릴라전을 펴는 그린베레(베트남전 미군특수부대)출신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람보3)가 허리우드에서 제작될 정도로 미국의 미디어와 여론도 아프간전사들을 반공동지로 여겼다. 소련군을 무찌르기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무자헤딘의 적개심'이 20년후 펜타곤에 자살비행을 감행한 '테러리스트들의 광기와 증오심'으로 이어지리라고 어떤 미국인이 상상인들 해봤을까. 빈 라덴은 아프간전선에서 소련군을 향해 직접 총을 쏘는 전투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그는 이집트에서 아랍에미레이트에 이르기까지 아랍각국 부호들로부터 전쟁자금을 끌어내는 루트를 구축하고 서구의 최신정보전기술을 습득,전파하는 한편 게릴라를 양성하는 전략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 때 습득한 '노하우'를 훗날 반미테러에 활용하게 되리라는 것을 빈 라덴 자신은 예감했을까. 아프간 게릴라들과 아랍의용군들은 '2주일이면 아프간 전역을 평정한다'던 개전당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의 호언장담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5만명의 병력손실을 입은 소련은 고르바초프 시대에야 아프간 진흙탕에서 벗어난다. 미국은 중동에서 힘의 우위를 구축한데 만족했지만 오랜 실전경험과 신사고로 무장한 채 귀국한 아랍의용군들은 현실에 전혀 만족하지못했다. 그것이 불행의 불씨요 도화선이었다. 의용군들은 '우리 아랍청년들이 단결해서 제국주의(소련)를 물리치고 괴뢰정권(아프간친소정권)을 쓸어버리는 무력혁명을 실현했다'고 자부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랍의 구태의연한 국내 정치체제에서부터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중동질서까지 모두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 비쳤다. 빈 라덴도 귀국했을 땐 그의 연설을 담은 테이프가 공식배포될 정도로 영웅대접을 받았으나 곧 요주의인물로 찍힌다. 격분한 과격파들은 미국을 중동에서 몰아내야 아프가니스탄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둔 반외세무력투쟁이 완결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우선 해외주둔미군을 상대로 폭탄테러를 시작했다.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이 중동을 군사적으로 완전 장악한데이어 부시정권이 이스라엘쪽으로 표나게 기울자 그들은 '성전(지하드)의 이름'으로 미국본토테러를 결행할 결정적인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같다. 뉴욕과 워싱턴 테러과정에서 보여준 주도면밀한 작전,자살돌격,전문가 양성훈련,신분위장 기술은 게릴라전에 첨단정보전을 가미한 수법이다. 이중 상당수는 아프간10년전쟁에 참전한 아랍청년들을 통해 중동에 전파됐다. 게중에는 미국 CIA요원들이 가르쳐준 기술도 섞여있을 것이다. 빈 라덴같은 극렬반미테러분자의 등장은 미국이 세계유일의 슈퍼파워로 군림하는 과정에서 쌓은 예기치못한 업보일지도 모른다. 지난번 테러는 반소전선에서 미국과 손잡았던 아랍저항세력이 '악몽의 부머랭'이 되어 미국심장부를 강타한 셈이다. 미국은 이 부머랭을 없애버리기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부머랭은 세게 내치면 내칠수록 되돌아쳐 오는 힘도 더욱 세진다. 부머랭을 너무 세게 내던지면 엉뚱한 주위 사람을 다치게한다. 미국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lee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