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인 탐구] 김동수 <한국도자기 회장> .. 창립 58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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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는 사람에게 '빚'은 가장 큰 고민거리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빚 걱정 때문에 잠못이루는 사장들도 많을 것이다.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65)은 이런 면에서 보면 '행복한' 사람이다.
올해로 창립 58주년을 맞고 있는 한국도자기는 보기 드물게 부채가 전혀 없는 회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부채비율 0%'의 신화를 이루기까지 김 회장은 빚더미에 허우적거리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차입 경영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빚 걱정을 해 본 사람만이 빚 없는 행복이 어떤 건지 안다"며 조용히 웃는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지난 주말 김 회장을 만나러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다.
검은 머리를 거의 찾을 수 없는 김 회장의 첫 인상은 마음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았다.
악수하느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역시 그의 따뜻한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김 회장에게서 묻어나오는 이런 '정'은 그의 경영철학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한국도자기는 독특하게 '충효(忠孝)사상'을 경영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다.
"효도하는 마음만큼 깨끗한 마음은 없어요. 그 마음을 담아 도자기를 만들면 그보다 더 좋은게 어딨겠어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孝)으로 정성스레 제품으로 만들어 전통적인 가치를 계승하고 충(忠)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회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마다 5월이 되면 한국도자기에서는 독특한 행사가 열린다.
이 회사의 계열사인 수안보파크호텔로 사원 부모님을 초청해 사원들에게 하룻동안 마음껏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약간의 '효도비'도 지급해 사원들이 좋은 아들 딸이 되는데 적극 도와준다.
김 회장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원들의 복지를 챙기는 데도 적극적이다.
그가 가장 큰 자랑으로 꼽는 것이 청주공장에 있는 '성종 어린이집'.
공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미취학 자녀들을 위해 만든 탁아시설이다.
웬만한 대기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도의 시설에다 교육 프로그램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사원들이 정말 만족해 한다고 김 회장은 전했다.
모범사례로 선정돼 대기업에서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을 정도라고.
이런 세심한 배려 덕분에 한국도자기는 창업 이후 한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
얼마전 노동부에서 실시한 직장 만족도 조사에서도 전국에서 최고점을 기록했다.
이처럼 '일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기까지는 외양이 아닌 내실로 승부한다는 김 회장의 고집이 크게 작용했다.
"다이아몬드는 크기로 보면 바위에 비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찾는 건 바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는 규모는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며 값지고 빛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회사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다.
195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창업주 김종호)가 하던 사업을 물려받았다.
사업이래봤자 직원 30명 남짓한 조그만 도자기공장 운영이었다.
회사로서의 틀은 전혀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다.
"재무구조를 들여다 봤더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고 김 회장은 기억을 되살렸다.
김 회장은 '빚과의 전쟁'을 펼쳐 나갔다.
그러기 위해선 기술개발로 품질을 높인 다음 효과적인 판매망을 통해 제품을 많이 파는게 우선이었다.
효율적인 판매망 관리를 위해 서울 명동에 다섯평 크기의 조그만 사무소를 개설했다.
한국도자기의 대표적인 제품인 '황실장미 홈세트'도 이 무렵 선보였다.
1968년 김 회장은 도자기 업종으로는 처음으로 텔레비전 광고를 했고 황실장미 세트는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다.
해외 수출에도 뛰어들어 10만달러의 수출고를 올렸다.
한국도자기는 승승장구했고 5년 뒤인 1973년 3백만장이나 되던 사채카드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도자기는 부채가 전혀 없고 어음이 아닌 현금으로 거래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김 회장은 "우리 회사만큼 경리부가 조용한 회사가 없을 겁니다.
빚 걱정 없고 모두 현금으로 거래하니 부산떨 일이 없는 거죠"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가장 기억나는 순간을 묻자 김 회장은 눈을 지긋이 감고 30년 전의 일화를 꺼냈다.
"73년 3월이었죠. 청와대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워낙 시끄러웠던 시절이라 초긴장 상태로 청와대에 갔었죠"
그러나 뜻밖에 그를 부른 건 육영수 여사였다.
육 여사는 청와대에 있는 식기가 일제인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김 회장에게 국산 본차이나(소뼛가루를 이용한 제품) 개발을 의뢰했다.
김 회장은 그길로 영국의 크레스콘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본차이나 개발에 성공했고 그때부터 청와대 식기는 일제에서 국산으로 바뀌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 회장은 연세대 상대를 나왔다.
동기였던 송자 전 연세대 총장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그는 최근 들어 동문들 사이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비견된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세계경영을 모토로 회사 몸집을 불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김 회장은 그저 조용히 집안 살림 챙기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이제 김 회장은 자신있게 반문한다.
지금 이 순간 김 전 회장과 자신, 둘 중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이냐고.
이제 지하철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김 회장은 곧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라고 한다.
그런 그에게 현직에 있으면서 이루고 싶은 꿈이 뭔지 넌지시 물어봤더니 예상외로 소박한 대답이 나왔다.
"내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생활용품 박람회에 1백평 가량 되는 부스를 만들 겁니다. 거기에 동양과 서양의 특징을 조화시킨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40년 도자기 인생을 도자기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진정한 '장인(匠人) 정신'이 느껴졌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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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생년월일 =1936년 3월5일
출신학교 =청주고, 연세대 경제학과
경력 =한국도자기 입사(59년) 청주대 강사(69년) 한국도자기 사장(74년) 수안보파크호텔 회장(84년) 한국도자기 회장(90년)
가족관계 =부인 이의숙씨와 2남1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