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茶山경제학賞] 다산을 생각한다 : '생애와 사상'

조선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조야(朝野)에서 두루 빛난 대학자였다. 다산은 영조 38년에 경기도 남양주 능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 어머니(해남 윤씨)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다산은 22세때 진사 시험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정조의 눈에 띄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쳤고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들의 폭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 후일 '목민심서'를 쓰는 계기가 됐다. 천주교와의 만남과 정조의 죽음으로 다산은 시련기를 맞이한다. 신유박해(1801)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돼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것. 그러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인 동시에 학문적 수확기였다. '목민심서'를 비롯해 정치 경제 철학 군사 지리 의학 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친 5백여권의 방대한 저술이 이 때 이뤄진 것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다산은 '흠흠신서' 등의 집필을 계속, '여유당전서'를 완성한다. 다산은 주자학이 관념론에 젖어 조선후기의 사회적 변동에 따른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데 주목,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을 강조했다. 특히 주자학의 철학적 기반을 벗어나지 못했던 초기 실학파와 달리 실증주의적 학문론을 바탕으로 유교경전을 재해석, 전통 유교 이론과 다른 새로운 사상체계를 개척해 냈다. 정치적으로는 천명(天命)보다 백성의 자율적인 의지를 내세웠고 사회적으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계급이 아니라 순수한 직업으로 파악하려는 사회분업론을 체계화했다. 또 중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구의 자전설을 인식하는 등 과학적 세계관을 가졌다. 양반과 선비도 농사를 지으라고 주장하면서 농서와 의서, 과학서를 쓰고 숱한 발명품을 남긴 것은 이같은 세계관 덕분이다. 경세치용, 이용후생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던 것이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